이것이 나의 인생/역사 속으로

87년 6월을 추모하며..

자발적한량 2008.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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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두환 정권의 장기집권 음모가 노골화되어 갈수록 민중의 저항 의지는 그에 비례해서 6월 항쟁의 시발점이 되는 86년 5·3인천사태 등으로 한층 높아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사태를 극적으로 뒤집는 사건이 터졌습니다다. 경찰이 서울대생 박종철군을 고문, 끝내 목숨을 앗아가고 만 것입니다. 사건이 터지자 당국은 평소 해왔던 대로 사건을 얼버무리려 했습니다. 경찰 당국은 박종철 군이 심문을 시작한 지 30분 후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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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열사


 이에 발맞추어 문공부 홍보조정실은 각 언론사에 '보도지침'을 시달하여 '박군이 심장마비로 쇼크사한 것으로, 1단 기사 처리'하도록 하였습니다.그러나 부검 결과 박군은 수십 군데에 이르는 피멍 자국이 있었고,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받은 흔적이 뚜렷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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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현장 검증 모습


 이 사건은 곧장 전두환 정권의 본질을 폭로하면서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을 규탄하는 성명서 발표와 추도미사 및 기도회, 항의농성 등도 잇따랐습니다. 이같은 민중의 거센 항의 열기에 김대중, 김영삼 양김씨는 통일민주당 창당을 선언하였습니다. 통일민주당의 창당은 미국의 주도 아래 진행된 보수대연합 시나리오가 파탄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었고 마침내 전두환은 민중의 개헌 요구를 거부하는 이른바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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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대로에 누워 '호헌철폐' 외치는 시위군중


 그러나 4·13 호헌조치는 즉각 거센 반대 여론을 불러일으켰고 각계각층속에서 호헌조치를 반대하는 서명과 농성이 꼬리를 물고 계속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 동안 전두환 정권의 폭정에 방관자적 입장을 취하던 사람들이 다투어서 반독재 합류하였습니다. 두환 정권은 급속도로 고립되어 갔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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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규탄시위


 그러던 중 민중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중요한 사건이 터졌습니다.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 7주년 추모미사에서 김승훈 신부가 "당국은 철저하게 이 사건을 은폐했고 과정 일체도 조작해서 국민을 다시 한번 속였다"며 박종철 군을 고문한 경관이 모두 다섯 명임을 폭로했던 것입니다. 민중은 경악했고 여론은 들끓었습니다. 민중의 분노는 한 점의 불꽃만 당기어진다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킬 기세였습니다. 이제 민중의 분노만 담아 낼 그릇만 준비하면 되었습니다. 이러한 여망을 딛고 마침내 5월 27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과 통일민주당이 주축이 되어 광범위한 민주세력을 묶어 세운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탄생했습니다. 민중들은 국민운동본부를 통해 범민주세력이 하나로 단결되었음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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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당 전당대회에서의 노태우


 6월 10일 아침, '민정당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후보 지명대회'. 같은 육사 11기인 전두환과 노태우는 손을 마주 잡고 치켜올림으로써 권력승계 절차가 원만히 이루어지고 있음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날의 잠실 체육관은 분노한 민중의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외로운 섬이었습니다. 같은 시간에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22개 도시는 24만여 명(국민운동본부 집계, 경찰 발표는 1만 8천5백 명)이 참여한 가운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 쟁취 범국민대회'가 열렸습니다. 역사적인 6월항쟁의 막이 오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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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 앞에서의 농성

 이날 서울에서만도 30여 군데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초조해진 경찰은 해가 지자 더욱 포악해져 무차별 폭행을 가하면서 전국에 걸쳐 3천8백여 명을 무차별 연행했습니다. 그러던 중 서울 도심의 시위대 일부가 명동성당으로 밀려갔습니다. 밤 10시가 되자 8백 명으로 불어난 명동성당의 시위대는 횃불을 들고 맹렬한 투석전을 벌여 경찰을 밀어내고 바리케이트를 설치했습니다. 이것이 전국을 휩쓴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된 5일간의 명동성당 농성투쟁의 시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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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시위중인 시민들


 민중의 투쟁 열기는 갈수록 높아져 6월 18일 전국 16개 도시에서 항쟁 기간중 최대 인파인 1백50만명(국민운동본부 집계, 경찰 발표는 8만 6천 명)이 거리를 가득 메웠습니다. 투쟁의 파고는 높아지고 경찰력은 한계가 드러냄에 따라 전두환 정권의 일각에서는 군대를 투입해야 한다는 의견이 급속히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분노한 민중은 정권의 군투입 위협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군이 투입되면 결연히 맞서 싸워야 한다는 의지가 민중들 사이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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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는 시민들


 군투입 위협에 맞서 가장 과감하게 투쟁했던 것은 부마항쟁의 주역이었던 부산시민이었습니다. '최루탄 추방대회'가 열린 6월 18일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시위가 전개되었지만 그 규모와 치열함에서 부산은 단연 압도적이었습니다. 부산시민들은 자신들이 움직이면 정권이 바뀐다는 확신으로 이번 기회에 아예 정권을 갈아 치우자는 의지를 갖고 적극적인 투쟁을 벌여 나갔던 것입니다. 부산에서의 대대적인 항쟁은 전국적으로 커다란 파급 효과를 가져왔으며 그 중에서도 광주시민에게 준 영향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 민중은 광주민중항쟁의 세례를 받은 뒤 새롭게 투쟁의 현장에 나선 상태였습니다. 광주민중항쟁의 불씨가 전국에 퍼져 나가 마침내 수많은 불기둥을 만들어낸 순간이 바로 1987년 6월항쟁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광주는 더 이상 외로운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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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앞에서 시위 중인 학생들


 6월 26일 국민운동본부의 제창에 의해 개최된 '국민평화대행진'에서 전국의 34개 도시와 4개 군에서 1백만 명(국민운동본부 집계, 경찰 발표는 5만 8천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광주에서는 약 30만의 시민이 거리를 가득 메웠습니다. 이미 6월 20일부터 백악관에 한국대책 특별반을 편성하여 운영하는 등 당황한 빛이 역력했던 미국은 더욱 공개적으로 한국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고 항쟁기간 동안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6월 26일의 투쟁이 벌어지자 더 이상 지체할수 없다는 판단에 도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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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속의 6.29 선언


 결국 6월 29일 한국의 텔레비전에는 노태우가 그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그 자리에서 노태우는 직선제 개헌의 수용과 구속자 석방 및 김대중 씨의 사면·복권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예의 6·29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6·29 선언이 민중을 뿌듯하게 했던 것은 거듭되는 군투입 위협에 맞서 항쟁을 계속했고, 그 결과 군투입 기도를 파탄시켜 내면서 끝내 항복선언을 받아냈다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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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위한 뜨거운 갈망이었던 6월 항쟁


 이것은 분명 총칼의 위협 앞에 맥없이 굴복해야 했던 굴종의 시대를 자신의 손으로 마감한 것에 대한 벅찬 환희였습니다. 그러나 민중들은 냉정을 잃지 않았습니다. 6월항쟁은 기나긴 압제와의 전쟁에서 중요한 매듭 하나를 푼 것에 불과했습니다. 이러한 민중의 마음가짐은 항쟁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규모 행사를 통해서 뚜렷이 표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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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이한열 열사.


 이한열군은 6월 9일 다음날 열릴 예정의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여기서의 고문살인은 같은 해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일컬음)를 앞두고 연세대에서 열린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후의 시위 도중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아 한달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7월 5일 스물 두살의 나이에 사망하였습니다. 일부 전경이 시위진압도중 시위대를 겨냥해서 최루탄SY44를 총처럼 수평으로 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것이 머리에 맞은 것입니다. 당시 이한열이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같은 대학 학생 이종창에 의해 부축당한 채 피를 흘리는 사진은 뉴욕타임즈 1면 머릿기사에 실리기도 하면서 독재정권의 폭압적인 무력진압의 잔인성을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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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


 7월 9일, 이한열군의 장례식이 있던 날, 100만명의 사람들이 광장을 가득 메웠습니다. 이 날의 자리는 항쟁의 마무리이자 새로운 출발을 기약하는 자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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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대투쟁


 6월항쟁은 결코 6·29선언으로 종식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새로운 투쟁의 파고를 준비하는 격렬한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6·29선언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 선거라는 중대한 승부에 몰두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이제부터다'라고 외치며 박차고 일어선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이 사회에서 가장 큰 집단을 이루고 있으면서 동시에 이 나라 경제를 두 어깨에 걸머지고 있는 노동자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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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대투쟁.


 노동자들은 6월항쟁을 통해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권력이 거대한 민중의 힘에 굴복하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자신의 힘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러한 자신감이 선진 노동자들로 하여 그 자신의 노동현장에서 투쟁을 적극 주도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결국 7·8·9월 노동자 대투쟁은 거리에서 타오른 6월항쟁의 불길이 노동현장으로 옮겨 붙음으로써 가능했던 것입니다. 6월항쟁의 뜨거운 열기가 채 식지 않았던 1987년 7월 3일, 우리나라 최대의 중공업 도시 울산에서는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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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투쟁


 전국을 뒤흔든 노동자 대투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현대엔진 노동조합이 결성된 것입니다. 현대엔진노조의 결성은 즉각적으로 울산 전역을 노동자 투쟁의 불길에 휩싸이게 하였습니다. 일단 치솟은 투쟁의 불길은 무서운 기세로 부산, 거제, 마산, 창원으로 번져 갔고, 이윽고 서울, 인천, 부천, 구로, 안양, 군포, 성남 등 수도권으로 옮겨 붙기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업종별로도 제조업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운수업, 광업, 사무·판매·서비스직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확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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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공업 노조들의 투쟁 모습


 이렇게 해서 19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 기간동안 새롭게 결성된 노동조합은 자그만치 1,060개였습니다. 이는 지난 1980∼86년 동안의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수치였습니다. 아울러 대투쟁 기간동안 발생한 노동쟁의 건수는 3,458건으로 하루 평균 40여건 씩 터져 나온 셈이었습니다. 이는 1986년 하루 평균 0.76건에 비해 무려 50배나 증가한 것이며, 1980년 봄의 노동자투쟁(총 407건)보다 8배나 증가한 것이었습니다. 가히 봇물 터지는 듯한 기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7·8·9월 노동자 대투쟁은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노동자가, 가장 밑바탕에서부터 억압 질서를 뒤흔들어 놓으면서, 끝내는 그것을 뒤엎을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역사는 비로소 강력한 엔진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세상을 뒤흔든 100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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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로부터 21년이 지났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피값으로 이룩한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2008년 대한민국의 6월은 민주화에 온 몸을 바친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다시금 되돌리려 하고 있습니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 국민이 섬김을 받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목숨을 내놓았던 박종철, 이한열 열사. 또 다시 그러한 희생을 치루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2007년 6월항쟁 20년 만에 6월 10일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어 세종문화회관에서 기념식이 있었지만 올해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대통령과 한나라당, 자유선진당 대표가 불참한 가운데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6월 항쟁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오늘의 포스트는 작년 6월항쟁 기념식에서의 노무현 前 대통령 기념사를 마지막으로 마치겠습니다. 민주화를 위해 희생한 민주열사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 노무현 대통령 기념사 >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정말 감회가 새롭습니다.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벌써 20년이 흘렀습니다. 4·13호헌 조치는 서슬이 시퍼랬습니다. 그러나 국민의 소망은 간절했고, 분노는 뜨거웠습니다. 마침내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군사독재를 무너뜨렸습니다.
국민이 승리한 것입니다. 정의가 승리하고, 민주주의가 승리한 것입니다. 참으로 감격스러운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땀과 피를 흘리고,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이 자랑스러운 역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분들의 고귀한 희생에 경의를 표하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 항쟁을 이끌어 주신 항쟁 지도부, 하나가 되어 승리의 역사를 이룩하신 국민 여러분께 깊은 존경을 표합니다.

국민 여러분,
6·10민주항쟁은 특별히 기억에 새겨두어야 할 의미가 있는 역사입니다.
6·10항쟁은 국민이 승리한 역사입니다. 그동안 우리 역사에는 자랑스러운 역사로 기억할만한 많은 투쟁이 있었고, 오늘날 우리는 이들을 엄숙하게 기념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아무런 주저 없이 승리한 투쟁으로 말할 만한 역사를 찾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6·10항쟁은 승리했습니다. 항쟁 이후 20년간, 우리는 군사독재의 뿌리를 완전히 끊어내고 민주주의를 꾸준히 발전시킴으로써 6·10항쟁을 승리한 역사로, 주저 없이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승리한 역사는 소중한 것입니다. 국민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그 위에 새로운 역사를 지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6월항쟁은 자연발생적인 항쟁이 아니라, 잘 조직되고 체계화된 국민적 투쟁이었습니다.
항쟁의 지도부는 잘 조직되어 있었고, 각계의 지도자들이 두루 참여하여 국민들에게 신뢰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지향하는 가치와 목표를 뚜렷이 제시함으로써 국민 모두가 참여하는 대중적 투쟁을 이끌어 냈습니다. 그리고 승리했습니다. 잘 조직된 국민의 의지와 역량이 역사의 진보를 이루어낸 것입니다. 6월항쟁은 가치와 목표를 더욱 뚜렷하게 제시하여 국민을 통합하고, 잘 조직하면, 더 큰 역사의 진보를 이루어 낼 수 있다는 믿음의 근거가 될 것입니다.
6·10의 승리는 축적된 역사의 결실입니다. 우리 국민은 오랜 동안 많은 항쟁의 역사를 축적하여 왔습니다. 부패하고 무능한 전제왕권의 학정에 맞섰던 민생·민권 투쟁, 일본 제국주의에 맞섰던 수많은 민족독립 투쟁, 그리고 군사독재에 맞선 꾸준한 민주주의 투쟁들이 그것입니다.
우리 국민은 수많은 좌절을 통하여 가슴에 민주주의의 가치와 신념을 키우고, 그리고 역량을 축적하여 왔습니다. 의미 있는 좌절은 단지 좌절이 아니라 더 큰 진보를 위한 소중한 축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6월항쟁의 승리를 보고 일시적인 좌절을 두려워하지 않는 지혜, 당장의 성공에 급급하여 대의를 버리지 않는 지혜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6월항쟁은 그 역사적 의미로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국가 발전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87년 이후 우리 경제는 개발 연대의 요소투입형 경제를 넘어서, 지식기반 경제, 혁신주도형 경제로 전환하고, 세계와 경쟁하여 당당하게 성공하고 있습니다. 국민총생산은 87년 세계 19위에서 2005년 12위로 상승하였습니다. 같은 기간 동안 1인당 국민소득은 63위에서 48위로 상승하였습니다. OECD 국가 중에는 24위입니다. 그 밖에도 많은 경제지표는 우리 경제가 87년 이후 장족의 발전을 하였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관치경제, 관치금융을 청산하여 완전한 시장경제를 실현하고, 투명하고 공정한 시장을 만들어 그 위에서 다양성을 존중하고, 자유와 창의로 경쟁할 수 있게 된 결과입니다.
6·10 항쟁의 승리와 정권교체, 그리고 지난 20년간 꾸준히 이어진 청산과 개혁이 없었더라면 이룰 수 없는 성과를 이루어낸 것입니다.
97년 경제 위기 때문에 많은 지체가 있었습니다. 아직도 그 당시의 지표를 회복하지 못한 항목이 적지 않습니다. 97년 경제 위기는 관치경제, 관치금융, 법치가 아닌 권력의 자의적 통치라는 독재시대의 낡은 체제를 신속히 개혁하고 정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완전한 정권교체로 완전한 민주정부가 들어서서 신속하고 철저한 개혁으로 극복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97년 이후의 우리 경제의 지체를 빌미로 민주세력의 무능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양심이 없는 사람들의 염치없는 중상모략입니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에 관하여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저는 해외에 나가서 우리 한국이 단지 경제에만 성공한 나라가 아니라 민주주의에도 성공한 나라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 정통성을 가진 지도자가 국제사회에서 제대로 대우받고 나라의 위상도 높인다는 사실도 실감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해 오신 모든 분들께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국민 여러분,
그러나 6·10항쟁은 아직 절반의 승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우리는 정권교체를 이루고, 특권과 유착, 권위주의와 부정부패를 청산하고, 투명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뒤늦기는 하지만, 친일 잔재의 청산과 과거사 정리도 착실히 해나가고 있습니다.
제도의 측면에 있어서는 독재체제의 청산과 민주주의 개혁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반민주 악법의 개혁은 미완의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지난날의 기득권 세력들은 수구언론과 결탁하여 끊임없이 개혁을 반대하고, 진보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국민으로부터 정통성을 부여받은 민주정부를 친북 좌파정권으로 매도하고, 무능보다는 부패가 낫다는 망언까지 서슴지 않음으로써 지난날의 안보독재와 부패세력의 본색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아가서는 민주세력 무능론까지 들고 나와 민주적 가치와 정책이 아니라 지난날 개발독재의 후광을 빌려 정권을 잡으려 하고 있습니다.
지난날 독재권력의 앞잡이가 되어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민주시민을 폭도로 매도해 왔던 수구언론들은 그들 스스로 권력으로 등장하여 민주세력을 흔들고 수구의 가치를 수호하는 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 중에 누구도 국민 앞에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군사독재의 잔재들은 아직도 건재하여 역사를 되돌리려 하고 있고, 민주세력은 패배주의에 빠져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정으로 아직 우리 누구도 6월항쟁을 혁명이라고 이름 붙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모양이 된 것은 6월항쟁 이후 지배세력의 교체도, 정치적 주도권의 교체도 확실하게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민주세력의 분열과 기회주의 때문입니다.
87년의 패배, 90년 3당 합당은 우리 민주세력에게 참으로 뼈아픈 상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역주의와 기회주의 때문에 우리는 정권교체의 기회를 놓쳐버렸고, 수구세력이 다시 일어날 기회를 준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뼈아픈 상실은 군사독재와 결탁했던 수구언론이 오늘 그들 세력을 대변하는 막강한 권력으로 다시 등장할 수 있는 기회를 허용한 것입니다.
분열과 기회주의가 6월항쟁의 승리를 절반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국민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지도자들이 잘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머지 절반의 승리를 완수해야 할 역사의 부채를 아직 벗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 앞에 놓인 과제는 자명합니다. 나머지 절반의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
반독재 민주화투쟁의 시대는 끝이 났습니다. 새삼 수구세력의 정통성을 문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민주적 경쟁의 상대로 인정하고 정정당당하게 경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하여 대화와 타협, 승복의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87년 이후 숙제로 남아있는 지역주의 정치, 기회주의 정치를 청산해야 합니다. 수구세력에게 이겨야 한다는 명분으로 다시 지역주의를 부활시켜서는 안될 것입니다. 기회주의를 용납해서도 안됩니다.
이와 함께 눈앞의 정치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후진적인 정치제도도 고쳐서 선진 민주제도를 만들어야 합니다. 대통령 단임제와, 일반적으로 선거운동을 금지하고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중립을 요구하는 선거법, 당정분리와 같은 제도는 고쳐야 합니다. 여소야대가 더 좋다는 견제론, 연합을 야합으로 몰아붙이는 인식도 이제는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선진국다운 정치를 할 수 있습니다.
언론도 달라져야 합니다. 이상 더 특권을 주장하고 스스로 정치권력이 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사실에 충실하고, 공정하고 책임 있는 언론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언론의 수준만큼 발전할 것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남은 개혁의 과제입니다.
주권자의 참여가 민주주의의 수준을 결정할 것입니다. 정치적 선택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서 주권을 행사하는 시민, 지도자를 만들고 이끌어가는 시민, 나아가 스스로 지도자가 되는 창조적이고 능동적인 시민이 우리 민주주의의 미래입니다.
저는 우리 국민의 역량을 믿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못해낼 것이 없는 우리 국민입니다. 20년 전 6월의 거리에서 하나가 되었던 것처럼 이제 우리의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데 함께 힘을 모아나갑시다. 지역주의와 기회주의를 청산하고 명실상부한 민주국가, 명실상부한 국민주권 시대를 열어갑시다.
감사합니다.
2007년 6월 10일 대통령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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