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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제 59주년, 진보와 보수를 넘어 평화의 한반도를 위하여

자발적한량 2009.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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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이 발발한 지 59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조국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앞장서셨던 호국영령들을 추모합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20분. 북위 38도선 전역에서 북한은 기습적으로 남침을 해옵니다. 이 당시만 해도 서울에서는 북한의 남침을 작은 무력충돌 정도로 받아들였었죠. 6월26일. 라디오에서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목소리가 흘러나옵니다.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십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국군의 총반격으로 적은 퇴각 중입니다. 우리 국군은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할 것입니다. 이 기회에 우리 국군은 적을 압록강까지 추격하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달성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리고 이날 이승만은 도쿄에 머물고 있던 미국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런데 통일을 달성하겠다던 이승만은 하루 전인 27일 새벽 2시 서울 시민들을 버리고 대전행 특별 열차를 탔습니다. 라디오에서는 녹음해둔 대통령의 육성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었죠. 비상 국무회의에선 정부의 수원 천도가 정식으로 의결되었습니다. 아침 6시에 서울중앙방송은 수원 천도 소식을 전했으나, 이를 취소하라는 압력으로 취소 방송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날 저녁에 서울 근교까지 밀어닥친 인민군들과 육박전을 감행했으나, 워낙 전세가 불리하여 남한은 정부를 대전으로 또다시 옮겼습니다. 그리고 28일,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인민군에게 점령당하고 맙니다.


 28일 새벽 2시 30분경 정부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강다리를 폭파하였습니다. 이 폭파로 50대 이상의 차량이 물에 빠지고 최소한 500명이 폭사하고 맙니다. 당시의 전황으로 볼 때 6~8시간의 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기 폭파로 인명 살상은 물론 병력과 물자 수송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는 비판이 대두되자, 이승만 정권은 8월 28일 당시 폭파 책임을 맡았던 공병감인 대령 최창식을 '적전비행죄'로 체포해 9월 21일 사형을 집행했습니다. 최창식은 12년만에 재심을 거쳐 1962년 무죄 판정을 받아 사후 복권되었죠. 이토록 남한에는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시민들은 사회주의 통치를 피할 수 없게 되었죠. 


 유엔의 경고도 무시한 채 남진하던 북한을 막기 위해 16개 회원국으로 이루어진 유엔군이 편성됩니다. 한편, 대전에서 대구로, 그리고 결국 부산으로 내려온 정부는 한국군을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휘 하에 편입, 대폭 증강하여 낙동강선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고 반격을 감행하죠. 하지만 7월까지는 미국은 스미스 부대를 비롯한 육군 제 24사단이 무참히 패배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9월 15일 새벽 5시. 더글러스 맥아더 UN 연합군 총사령관의 지휘로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어 북한군의 허리를 잘라내는 데 성공합니다. 이 여세를 몰아 28일엔 서울을, 10월에는 평양을 거쳐 압록강을, 11월에는 두만간일대까지 진격을 하여 한반도가 통일이 되는 모양새를 갖추게 됩니다.


하지만 사태를 지켜보던 중국이 북한을 돕기 위해 참전을 하게 됩니다. 한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대부분의 기록에서는 넘치는 의용군을 바탕으로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공격해왔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38도선 이북에서의 전술적 패배와 이어진 1.4 후퇴를 합리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12월 14일부터 연합군은 38도선 이북에서의 대대적인 철수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1월 4일 다시 서울을 내주었고 곧 수원을 내주고야 맙니다. 바로 1.4 후퇴입니다. 하지만 곧 반격을 시작하여 3월 14일 서울을 다시 되찾게 됩니다. 그렇게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전쟁은 계속 되었고, 힘없는 국민들은 자신들에게 찾아오는 세력에 맞추어 깃발을 흔들어야 했습니다.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된 북한은 여러차례 정전을 제안하지만 이승만은 UN의 도움으로 통일된 한국의 지도자가 되기를 희망하였기에, 북한 정부를 완전히 제거하는 데 방해가 되는 어떤 평화 협정에도 반대하였습니다. 하지만 51년 7월 정전 회담이 개시되었고, 세계 전쟁 사상 처음으로 휴전이 되면 각기 점령 지역에서 국경이 정해지는 조건으로 싸우는 제한 전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결국 군사분계선은 52년 1월 27일에 타결되었으며, 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 만에 한국 전쟁은 휴전으로 매듭지어졌고, 현재까지 그 효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3년 1개월에 걸친 동족 상잔의 한국 전쟁은 한반도 전체를 폐허화했고, 참전한 외국의 병력에까지 극심한 해를 입었으며 이때 사용된 폭탄의 수는 불분명 하지만 1차 세계대전에 맞먹는다고 합니다. 한국전쟁은 그 밖에도 약 20만 명의 전쟁 미망인과 10만 명이 넘는 전쟁 고아를 만들었으며 1천만 명이 넘는 이산 가족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45%에 이르는 공업 시설이 파괴되어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이승만이 예상했던 대로 위기의 이승만 정권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전쟁을 통해, 아직 꼴을 갖추지 못했던 국가는 이제 미군의 주둔과 미국의 경제지원으로 군사적·경제적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고, 전쟁 이전부터 이승만 정권의 이념이었던 반공주의가 더욱 극심해져, 남한의 우경화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김일성 역시 전쟁 이후에 자신의 정적을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게 됨으로써 '김일성 유일체제'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그리고 사회주의적 공업화를 더욱 급속하게 추진할 수 있는 계기를 얻었죠., 급진적인 단기정책들의 효과는 미비하여 60년대가 지난 이후 남한과 비교에서 경제적인 상황이 매우 악화되었지만요. 수많은 국민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갔지만, 두 사람에게는 윈윈이었던 전쟁인 것입니다.


 한반도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세계에서 몇 안남은 폭약고 중 하나입니다.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고 하면 전세계가 벌벌 떨고, 특히나 일본은 온갖 호들갑을 다 떨죠. 조선시대 이전에는 중국과의 마찰과 전쟁 등이 있을 뿐이었지만, 제국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조선은 동아시아의 위치적 요건에 군침을 흘리는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었죠. 6.25 역시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이념에 의해 쪼개진 이 땅에서 누구 힘이 더 큰가 벌인 싸움이 벌어진 것입니다. 한반도는 장소 제공해주고, 날라오는 총알에 맞아서 죽고, 얻은 것 없었지요. 남북한 할 것없이 시체만 산처럼 쌓였습니다. 


 남북한 모두 한심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한쪽은 소련에, 한쪽은 미국에 붙어 누가 줄을 잘선건지 서로 우기던 것 밖에 되지 않죠. 이념의 싸움 속에 질려버린 사람들의 모습은 포로 석방 문제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양측의 전쟁 포로들은 자신의 의사에 따라 귀환 여부를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본국으로의 귀환을 거부하고 상대방의 국가로 귀순하는 사람들, 또한 귀순을 거부하고 자신의 국가로 귀환하는 사람들..한가지 눈 여겨 볼 점은 두 나라 모두 거부하고 제 3국으로 망명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점은 우리가 미국을 받드는 사대주의적 사고, '미국이 우리를 살렸다, 미국은 은인이다' 등의 생각을 조금은 바꿀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 미국은 남한을 도왔습니다. 많은 미군이 생전 처음와보는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에 참전하여 목숨을 바쳐 싸웠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주관에 따라 참여한 것입니다. '평화'라는 것을 위해. 더이상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없었으면 하기에. 그리고 미국 뿐이 아니라 유엔군은 16개국입니다. 수많은 나라들이 자유와 평화를 위해 이 땅에서 목숨을 바쳐가며 싸웠습니다.


 또한 미국은 굳이 우리를 도와주려 했다기보단, 한반도가 적화통일이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죠. 마치 베트남에 참전했던 것과 같이, 단지 그들은 공산주의가 팽창하는 것을 막고자 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에게 고마워해야할 필요가 전혀 없다, 이런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맹목적으로 미국을 '섬기는' 분들이 계셔서 코멘트를 좀 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6.25를 맞아  이 땅의 이념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현재 한반도라는 자그마한 장소에는 두가지 이념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단 북한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어떠한 말로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냥 독재국가이지요. 김씨왕조 국가라고 표현해도 별 무리는 없을 듯합니다. 같은 한반도이지만 북한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을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에서는 자유와 평화를 위한 행동 자체도 용납되지 않을 것이니까요.


 하지만 근래들어서는 이 남한땅 역시 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흡사 일제시대처럼 친일파들이 활개를 치며 일제강점기를 미화하고 사회 전반에 걸쳐 자신들의 소리를 내는가하면, 또 한편으로 정부는 마치 북한의 김씨왕조가 보이는 모습의 일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가 이 당에 태어난 것이 다행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자유와 평화, 민주주의를 위해 내가 작은 힘을 보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지요. 그게 아니면 남한이나 북한이나 사실 다를 것은 없어보입니다. 사는 수준의 차이 정도? 분명 이건 잘못된 일이지요.


 북한은 제쳐두고 남쪽만을 생각해서, 6월 25일인 오늘도 역시 진보와 보수(친일이 맞나?)는 서로 각을 세우고 있습니다. 진보에게 빨간 페인트를 칠해놓은뒤 이놈들 빨갛다고, 빨갱이, 친북좌익이라고 소리쳐대는 보수세력.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에게 친일파라고 손가락질하는 진보세력. 하지만 생각해봅시다. 6.25 전쟁이라는 민족적 비극에 대해서 가슴 아파하고, 다시는 그러한 비극이 벌어지면 안되겠다고 하는 쪽은 어느쪽이며, 그 때 무력통일을 했어야 한다, 북한을 쳐부술 기회였는데 아쉽다 등 6.25를 겪은 사람들이 맞는지도 의심스러운 발언을 하는 쪽은 어느쪽입니까? 

 진보와 보수를 떠나서 6.25는 다시는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민족의 비극입니다. 반대편에서 빨갱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는 저는, 미안하지만 그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6.25전쟁을 일으킨 북한을 절대 좋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빨갱이 주제에 북한을 나쁘게 생각해서. 하지만 저는 북한과 미국을 동일하게 안좋게 봅니다. 분명 한반도는 열강들에게 이용당한 측면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6.25가 북한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은 하지만, 남한 역시 북한을 얕잡아보고 대응했다는 점 등이 충분히 인정되지 않습니까? 집 근처 국립현충원을 지날 때면 걸려있는 현수막에 눈살이 찌푸려 집니다. 친북좌익세력 척결해야 호국영령들이 편안히 눈을 감는다는 내용의 현수막들. 과연 호국영령들께서 누구를 친북좌익으로 생각한다는 겁니까? 호국영령들께서 자신의 목숨을 바칠 때 이토록 같은 민족끼리 욕하고 싸우는 세상을 위하셨을까요? 가족과 이웃을 위해, 민족을 위해, 조국을 위해 장렬히 돌아가신 호국영령들이 과연 어떠한 민족, 어떠한 나라, 어떠한 세상을 원했는지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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