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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여행#2] '소리없는 아우성' 청마 유치환 문학관과 생가 그리고 친일 논란

자발적한량 2013.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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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 김춘수, 전혁림, 이중섭, 유치환, 박경리, 김상옥, 유치진. '이순신의 고장'통영은 '예향'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릴만큼 현대 예술인들을 많이 배출해낸 고장입니다. 통영여행의 이순신공원에 이어 두번째 일정으로 찾아간 곳은 바로 청마 유치환 시인의 생가와 문학관입니다. 타는 듯한 더위 속에 쫓기듯 문학관 안에 들어갔는데, 시원하게 나오는 에어컨과 마주하니 문학관 밖으로 나오기 싫어져 발 떼는 데 고생 좀 했습니다.



학창시절 국어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중학교 때 시에 대해서 배울 때 '공감각적 심상'과 '역설법'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배운 '소리 없는 아우성'. 바로 청마 유치환의 시 '깃발'입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가을 통영에 위치한 용화사에서 있었던 통영문화협회 모임 사진입니다. 박재성, 김춘수, 윤이상, 배종혁, 옥치정, 정윤주, 유치환, 전혁림, 정명윤 등이 나온 사진입니다.



문학관에는 청마 유치환의 생애가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통영의 많은 학교들의 교가는 유치환 작사 윤이상 작곡이 무척이나 많다고 합니다. 교육자로서도 활동을 했기에 얽힌 이야기들이 꽤 있습니다. 유치환이 통영에서 교장으로 있을 때, 자신의 글로 수업을 하고 있던 국어교사를 멀리서 본 뒤 후에 그를 교장실로 불러 "내 시가 그렇게 어려웠나요?"라는 질문을 했다는 에피소드도 있죠.



유치환의 시는 당대 시단의 서구지향적 방법론과는 달리 생명의 깊이를 탐구함으로써 새로운 정신적인 영역을 지향하였으며, 한국시의 풍토에 의지와 관념을 주조로 한 남성주의적 시풍을 확립하였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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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썼다는 육필 원고, 생전에 발간된 시집과 수상집, 그리고 동인지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청마의 생애 사진집과 고등학교 교장자격증, 그가 소지했던 유품들도 이렇게 전시되어 있구요. 유치환은 생전에 편지를 즐겨 썼는데, 통영 중앙우체국에서 5,000여 통의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편지도 일부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통영 중앙우체국을 '청마우체국'으로 이름을 바꾸자는 주장도 있었죠.



그의 작품이 수록된 전집, 관련 평론, 문예지와 잡지, 논문들도 상당히 많이 전시가 되어 있습니다.



문학관 위에 위치한 청마 생가. 원래 통영시 태평동에 위치했던 것을 옮겨서 복원한 것입니다.



청마 유치환에 대한 논란이 2가지 있습니다. 바로 하나는 통영시와 거제시의 '생가 논란'. 현재 청마 유치환의 문학관과 생가는 이웃에 위치한 통영과 거제에 각각 존재하고 있습니다. 유치환의 유족들과 거제는 1908년 거제시 둔덕면에서 출생해 1910년 통영으로 이사한 것으로 거제 출생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게다가 청마의 출생 당시는 거제가 통영에 포함되어 있었죠. 이와 관련하여 통영시를 상대로 "통영시 청마문학관 안내판에 적힌 부친 출생지를 삭제해달라"며 소송을 걸기도 했습니다.



일단 이에 대해 법원은 통영시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청마 유치환이 자작시 해설집인 '구름에 그린다'에서 스스로 통영에서 출생했다고 밝힌 점, 청마의 자작시 '출생기'에 '부친이 의원이던 시절 자신이 출생했다'고 적혀있는데, '동랑 유치진 전집'에 청마의 부친이 통영에서 한약방을 차린 것으로 나와 있는 점 등이 근거가 되었지요. 법원은 '통영시가 청마의 인격권을 훼손했다고 볼 수 없다'고 밝히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통영과 거제는 청마 생가가 자신들의 지역임을 서로 주장하며 기념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논란은 바로 '친일 논란'입니다. 그의 형은 일제시대 극작가이자 연극인이었던 동랑 유치진입니다. 유치진은 일진회 회장 이용구의 생애를 찬양한 <북진대>, 일본의 만주 침략을 긍정적으로 묘사한 <흑룡강> 등의 작품을 만든 대표적인 예술계의 친일파이지요. 참고로 광복 후 우익 연극계에서 반공 작품을 공연하며 대한민국 연극계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물론 형이 친일행위자라고 해서 동생도 친일을 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유치환의 친일 논쟁은 꽤 오래된 일입니다. 그의 시 "수"가 항일독립군을 꾸짖는, "전야"가 학도병 지원을 촉구한 작품이라는 지적이 있어왔죠. 하지만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유치환이 포함되지 않자 통영에서는 청마와 관련된 기념사업을 추진해왔습니다. 이 당시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수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면죄부가 주어진 것은 아니다"라며 더 조사를 해볼 필요가 있다고 밝혔고, 이에 대해 통영예총은 "사회적으로도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으면 무죄 추정 아니냐. 서정주처럼 확실하게 글을 발표한 것도 아니다. 무덤에 묻힌 사람한테는 관대해야 하는데, 민문연은 망자에 대한 예의도 없는 모양"이라며 크게 반발했었죠.



그런데 1942년 2월 6일 만주에서 발행된 친일성향의 한국어 일간신문인 만선일보에 유치환이 쓴 '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라는 산문이 공개됐죠. 

오늘 대동아전(大東亞戰)의 의의와 제국(帝國)의 지위는 일즉 역사의 어느 시대나 어느 나라의 그것보다 비류없이 위대한 것일 겝니다. 이러한 의미로운 오늘 황국신민(皇國臣民)된 우리는(중략)..오늘 혁혁(赫赫)한 일본의 지도적(指導的) 지반(地盤) 우에다 바비론 이상의 현란한 문화를 건설하여야 할 것은 오로지 예술가에게 지어진 커다란 사명이 아닐 수 업습니다.

이에 대해 청마관련 단체들은 '엿장수 가위질 같은 친일혐의 덧씌우기'라며 "만선일보에 게재된 다른 문인들은 민족작가로 대우하면서 우파문학의 대부였던 청마에게만 유독 좌파문인들이 가혹하게 친일 잣대를 들이댄다"고 주장했습니다. 얼마 전 난파 홍영후의 친일행적과 관련해 작곡가 류재준씨가 난파음악상 수상을 거부하면서 홍난파의 친일 행위가 이슈가 되었었죠. 아직 청마 유치환에 대한 친일 논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만, '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를 보면 유치환 역시 친일행위에 대해 자유롭지 못할 것 같습니다. 통영여행을 다녀온 뒤 여행기를 쓰며 알게되는 이러한 부분들에 대해선 무척이나 씁쓸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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