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한 헌법재판소, 길고 길었던 '헌재의 시간'

헌법재판소가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심판에서 윤 전 대통령을 파면했습니다. 헌재의 선고기일 지정이 지연되면서 헌법재판관 사이에서 의견이 갈리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난무했지만 결과는 소수의견 없이 만장일치로 8대 0 인용이었죠. 헌재는 3개의 '보충의견'을 냈습니다. 보충의견은 결론엔 동의하면서 이유를 보충할 필요가 있을 때 내는 의견으로, 다수의견과 결론은 같지만 결론에 이른 별도의 이유가 있을 때 제시하는 ‘별개의견’을 제시한 재판관은 없었습니다.

오전 11시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항대행이 결정문을 읊기 시작하자 나머지 재판관 7명 중 대부분은 무표정으로 일관했습니다. 조한창·김형두 재판관만 간혹 방청석을 살피는 모습을 보였죠. 22분 동안의 낭독이 끝나고 재판관들이 퇴장하면서 문 권한대행이 옆에 있던 김형두 재판관의 등을 툭툭 치는 모습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문 권한대행은 김 재판관의 어깨를 두드린 후 등을 쓸기도 했는데요.

지난해 12월 14일 탄핵소추안이 접수된 때로부터 111일, 지난 2월 25일 변론 종결 후 38일 만에 윤 전 대통령의 파면을 결정한 헌재. 이는 역대 대통령 탄핵 심판 중 최장 평의 기록입니다. 앞서 노무현·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심판의 경우 변론 종결 후 선고까지 각각 14일, 11일이 걸렸죠.

그간 헌법재판관들은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려왔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강한 여론 갈등에 박근혜 전 대통령 때보다 신변의 위협이 높아 보안에 신경을 썼다고 하는데요. 헌재를 잘 아는 한 법조계 관계자에 따르면 재판관들은 최근 외부로 다니기 어려워 외부 식사나 개인적 일 처리가 제한적이었다고 합니다. 한 재판관은 도산법 스터디에 참석하고 싶었으나 보안상 어려워 화상 카메라를 이용했다고 하죠. 마스크에 모자를 쓰고 식사를 하러 간 일도 많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윤 대통령 탄핵 심판 TF에는 10여명의 헌법연구관들이 참여했습니다. 헌법연구관들은 양측이 제출하는 증거, 의견서 등을 꼼꼼히 살펴보고 사실관계 판단·법리 검토를 해 헌법재판관들의 '집현전'으로 불립니다. 윤 대통령 전담 TF 외에도 약 70여명의 헌법연구관들이 한덕수 국무총리,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등 고위공직자 탄핵 심판이 밀려있었고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제기된 권한쟁의 심판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죠.
윤 전 대통령 파면한 헌법재판소 재판관 8인의 면면

이번 탄핵심판의 재판장은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인 문형배(59·18기) 재판관이 맡아 진행했습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 지명을 받아 임명된 문 대행은 사법연수원 기수와 나이 등을 고려해 지난해 10월 24일 재판관 회의에서 소장 권한대행으로 선출됐죠. 진보 성향 법관 모임인 우리법연구회 회장을 지낸 이력 등으로 ‘반탄’ 세력과 여당에선 심판 과정 내내 문 대행에 대한 비판을 이어온 바 있습니다. 국민의힘에서는 "이재명 대표 절친이자 친중인사"라고 공격한 것을 비롯해 문 대행이 이재명 민주당 대표 모친상 조문을 갔다거나 음란 게시물에 댓글을 달았다는 가짜뉴스가 돌았죠.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5일 "탄핵 심판 절차가 원만하게 진행되도록 충실한 보도를 해주신 언론인, 헌재의 안전을 보장해주신 경찰 기동대 대원들께 감사드린다"며 "탄핵 심판이 무리 없이 끝난 데에는 헌신적인 헌법연구관들과 열정적인 사무처 직원들의 기여도 있었다"고 소회를 밝혔습니다.

문 대행과 마찬가지로 문재인 대통령이 지명한 이미선(55·26기) 재판관은 역대 다섯 번째 여성 헌법재판관이자 최연소 재판관입니다. 평소 신중하고 조용한 성격으로 법원 재직 당시엔 손꼽히는 노동법 전문가로 노동자 법적 보호 강화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의 권리 보호에 큰 관심을 기울여 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김형두(60·19기) 재판관은 김명수 전 대법원장이 지명했으며 중도 성향으로 분류됩니다. 중앙지법 사법정책연구심의관과 대법원 사법정책연구심의관, 법원행정처 송무제도연구법관 등 법관 시절 사법행정 업무에 전문성을 갖췄죠. 풍부한 재판업무 경험과 해박한 법률지식, 사법행정 능력을 모두 갖춘 엘리트 법관이란 평가를 받습니다.

조한창(60·18기) 재판관은 지난 1월 국회 몫으로 국민의힘에서 추천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던 최상목 경제부총리가 임명했습니다. 조 재판관은 윤석열 정부에서 꾸준히 대법관 하마평에 올랐던 인물. 보수 성향으로 분류되지만 정치적 신념이 강하진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정미(56·25기) 재판관은 김명수 전 대법원장이 지명해 2023년 4월 취임했습니다. 국회 인사청문회 당시 대한민국의 주적이 누구냐는 물음에 "우리나라 주적에 대해 개인적 견해를 밝히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답해 논란이 있기도 했습니다.

정계선(55·27기) 재판관은 국회 몫으로 더불어민주당의 추천을 받아 임명됐습니다. 국회 몫으로 추천을 받아 임명된 첫 여성 재판관인데요. 사법부 엘리트 코스로 평가받는 사법연수원 교수를 거쳐 여성 최초로 부패 전담부(중앙지법 형사합의 27부) 재판장을 맡았습니다. 한덕수 국무총리에 대한 탄핵심판에서 8인의 재판관 중 유일하게 인용 결정을 내렸죠.

김복형(57·24기) 재판관은 조희대 대법원장이 지명했습니다. 서울지법 판사를 시작으로 수원·춘천·대구 등 전국 각 법원을 두루 거쳤고 대법원 재판연구관 시절 여성 법관 최초로 2년간 대법관 전속 연구관을 지냈습니다. 한덕수 총리 탄핵심판 사건에선 소추 사유 중 위헌·위법이 전혀 없다는 의견을 밝혀 이목을 끌었죠.

마지막으로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 사건의 주심(主審) 재판관으로 파면 결정문 초안을 작성한 정형식 재판관은 이번 탄핵 심판을 심리한 8명의 재판관 중 유일하게 윤 대통령이 지명·임명한 인물입니다.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에 대한 국회 표결을 하루 앞둔 지난해 12월 6일 정 재판관의 처형인 박선영 전 의원이 돌연 진실화해위원장에 임명되며 야권 일각에선 정 재판관의 공정성에 문제를 제기했었습니다. 윤 대통령이 처형을 진실화해위원장에 앉힌 것은 탄핵 방탄을 위한 '사전뇌물'이라는 이유에서죠. 다만 정 재판관은 탄핵심판 변론 과정에서 특유의 송곳 질문과 냉철한 원칙론을 보이며 이같은 우려를 일축했습니다.

정 재판관은 1961년 강원 양구에서 태어나 서울대 법과대학을 졸업 후 1988년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에서 판사 생활을 시작해 대법원 재판연구관, 서울고법 부장판사, 서울행정법원 수석부장판사 등을 역임했고 2019년 서울회생법원장으로 임명됐습니다. 2023년 2월엔 대전고등법원장에 임명됐고, 같은 해 11월 16일 윤 대통령 지명에 의해 유남석 전 헌재소장 후임으로 임명됐죠.

정 재판관은 윤 대통령 탄핵심판의 변론 준비 절차가 본격화하기에 앞서 사건을 총괄하는 주심 재판관이 됐습니다. 사건 전반을 관리하고 결정문 작성을 주도하는 주심 재판관은 무작위 전자배당으로 정해지는데요. 변론 준비와 심리 과정을 이끄는 등 재판 진행을 총괄하는 것 역시 주심 재판관의 역할입니다.

정 재판관은 변론 과정서 윤 대통령 측 주장을 배척하거나 몰아세우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지난 2월 13일 8차 변론기일 당시 윤 대통령 측이 조성현 국군수도방위사령부 경비단장에게 비상계엄 당시 국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군 병력을 파견했다는 주장을 부각하려는 듯한 신문을 반복하자 "맥락을 끊고 답을 강요하듯 질문하면 어떡하느냐"며 호통을 친 사례가 대표적이죠.

또 여인형 전 국군방첩사령관을 상대로 국회에 계엄군을 출동시킨 이유와 지시 주체 등을 캐물으며 탄핵심판 핵심 쟁점인 국회 장악 시도의 실체를 수면에 올리는가 하면, 조성현 수방사 경비단장에게는 총 59차례에 걸쳐 질의를 쏟아내며 국회 출입 통제 상황을 재구성했습니다. 한 전직 고위 법관은 그를 두고 '모두에게 친절하지만 법리에 양보 없는 대쪽 같은 원칙론자'라고 평가하기도 했죠.
해외 네티즌들 축하 쇄도, "한국이 세계 민주주의의 모범이 됐다"

한편 외신들은 한국이 헌정사 두 번째로 맞이한 대통령 파면 소식을 앞다투어 보도했습니다. 전세계 네티즌들은 "축하를 건넨다! 오늘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생명력이 다시 한 번 확인된 날" "대한민국 국민은 역사가 가르쳐준 대로, 독재에 맞서 싸우며, 다시 한 번 민주주의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윤석열의 탄핵은 정당했을 뿐 아니라,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번 탄핵심판의 결과가 전 세계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에 깊은 영감을 주길 바란다" "세상 어딘가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정말 반갑다!" 등의 반응을 보이며 이번 파면으로 한국이 세계 민주주의의 모범이 됐다고 평가했죠.

특히 미국 네티즌들의 반응은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미국 네티즌들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파면과 관련해 "미국이여, 메모하라. (탄핵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며 미국의 각성을 요구하는가 하면 "트럼프가 다음 차례" "2021년 1월 6일의 미국 의회의사당 폭동과 관련하여 군사법정에서 트럼프를 기소해야 한다" "저기 한국, 너희 재판관들 미국에 잠깐만 빌려주면 안 될까? 진짜 딱 5분 만에 탄핵하고 바로 돌려줄게" 등의 반응을 보이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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