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국회에서 26일자로 차별금지법안을 입법예고했습니다. 현재 민주통합당 김한길 의원 등 51인(1903693), 민주통합당 최원식 의원 등 12인(1903793), 통합진보당 김재연 의원 등 10인(1902463)이 발의한 총 3개의 차별금지법안이 위원회 심사절차에 들어가게 되는데요. 그 중 가장 발의 인원이 가장 많은 민주통합당 김한길 의원 등 51인이 발의한 의안번호 1903693 차별금지법의 제안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차별금지법 차별금지법안 기독교 동성애 성적 취향 일베
모든 생활영역에서 성별, 장애, 병력, 나이, 언어, 출신국가, 출신민족, 인종, 피부색, 출신지역,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전과(前科), 성적지향(性的指向), 성정체성, 학력(學歷), 고용형태, 사회적 신분 등을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ㆍ예방할 수 있도록 포괄적이고 실효성 있는 “차별금지에 관한 기본법”을 제정함으로써 사회 모든 영역에서 평등을 추구하는 헌법 이념을 실현하고 인간존엄의 가치를 구현하고자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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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입법 배경
지난 14일 유엔 인권이사회는 한국에 부여된 ‘국가별 정례인권검토(UPR)’ 권고사항 70개 중 42개를 수용한 한국 정부의 인권상황 개선 의견과 워킹그룹의 보고서를 채택했는데요. 바로 여기에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각국의 요구를 수용한 내용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국제기구가 차별금지에 대해 개별적으로 권고한 적은 많지만, 한국 정부가 국제무대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입법하겠다고 약속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요.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채택된 사항은 이행에 강제성은 없습니다만, 국제무대에 한국 정부의 의지를 표출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죠. 더구나 한국은 올해 임기가 시작된 유엔 인권이사회 이사국으로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책임감도 있습니다. 국가별 정례인권검토는 4년 반에 한 번씩 유엔 인권상황을 상호 점검하고 개선책을 권고하는 제도로 2008년 도입됐고, 우리나라는 2017년 다시 점검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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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움직임의 시작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국가인권위원회가 출범한 2000년대 초부터 그 필요성이 제기됐지만, 사회적 합의를 이루기 위한 노력이 뒷받침되지 못했습니다. 법무부에서 2010년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특별분과위원회를 구성해 운영했지만 결국 발의하지 못했죠. 기업은 나이와 학력 차별 제한 등으로 인해 채용을 제약받고 근로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기독교계 등은 ‘성적 취향(동성애 등)’이 포함되면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며 반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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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법 제정은 지난해 정부가 세운 5개년 단위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에도 포함된 내용인데요. 정부가 이번에 채택한 권고사항에는 ‘모든 환경에서 체벌을 명시적으로 금지’, ‘정부의 입장과 다른 의견을 포함한 인터넷상 표현의 자유 보장’ 등도 포함되어있습다. 다만 국가보안법 폐지, 사형제 폐지, 대체복무제 도입 등은 빠져있습니다. 법무부 관계자는 "사회적 분위기상 신중한 검토가 필요한 사항이라 당장 수용하긴 어렵다는 차원"이라고 설명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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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반대 움직임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하여 가장 반대를 하고 있는 쪽은 우선 개신교계입니다. 국가조찬기도회, 의회선교연합, 세계성시화운동본부, 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는 지난 12일 국회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반대 입장을 발표했는데요. 성명에서 이들은 "한국교회는 동성애자들을 차별하지는 않는다(?)"라고 전제한 후 "성적 소수자의 인권도 보호되어야 하고, 법 테두리 안에서 적절한 보호조치도 강구하여야 한다. 하지만 동성애와 동성혼은 창조질서를 거스르는 비윤리적인 행위이고, 헌법과 민법, 형법 질서에도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지적하며 정치권의 현명한 판단을 촉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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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교계 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한 '한국 교계 동성애·동성혼 입법 저지 비상대책위원회'가 출범하여 전국에서 동성애·동성혼 입법 저지를 위한 캠페인을 전개해 나가기로 했구요. 한국교회연합 역시 차별금지법과 관련한 성명을 발표하고 "본래의 취지가 이 법안에 포함된 일부 조항들 때문에 또 다른 사회적, 종교적 갈등의 불씨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며 법안 발의의 철회, 또는 재고를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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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와 개신교계의 불편한 동거(?)
우선 흥미로운 점은 평소 개신교계를 '개독'이라고 부르며 극심하게 혐오하던 일베가 개신교계와 함께 '차별금지법 반대'라는 같은 목표를 갖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신교계에서는 '성적 취향(동성애)' 문제에 대해 반대를 하고 있고, 일베에서는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문제에 대해서 반대를 하고 있죠. 허기사 일베에서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여자들을 '김치년'이라고 부르며 '보빨', '보슬아치' 등의 단어를 써 욕하고, 전라도 출신들을 '홍어새끼'라고 비하하는 등 평소 거의 모든 행동이 '차별'로 점철되어 있는 일베에서는 통과되어서는 안되는 법임에 틀림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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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에 대한 법안 발의자들의 입장
민주통합당 최원식 의원실의 보좌관은 "유엔에서 권고했다. 반대하는 입장도 있지만 찬성하는 견해도 상당하다. 상임위 등을 거치면서 의견 조절이 있을 것으로 본다"고 입장을 나타냈구요. 김한길 의원실의 관계자는 "반대자들이 너무 심각하게 반응한다. 논리적이지 못하지 않느냐. 동성애자 확산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민주당이 총선 때와 대선 때 어떤 정책을 냈는지 확인하면, 당의 입장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김진표 의원은 "법안이 동성혼을 인정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대로 통과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힌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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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안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우선 공통분모를 찾아보면 우리 사회에서 '차별'이라는 불평등·불합리한 상황이 존재하고 있고, 이를 고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종교라던가 사상·정치적 성향 등 의견이 갈리는 부분에 대해서는 서로의 입장을 조율해 나가면 되고, 법안을 고쳐나가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차별금지법' 자체를 아예 올리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차별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정할지, 처벌 조항을 어떻게 둘지, 성적 취향 등 논란이 되는 부분을 어떻게 할지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의 입법 과정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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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계의 왜곡, 오만한 시선
하지만, 일부 개신교계에서는 사실을 왜곡한 글들이 많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우리 목사님 잡아가는 법'이라고 부르며, 이단·사이비를 비판하지 못하게 입을 막는 법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교리로 금지된 동성애를 합법화하고, 이를 넘어서 동성애를 조장하고 가르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의 글들이 교인들 사이에서 빠르게 유포되고 있는데요. 우선 과연 이 사람들이 '차별금지법'에 대해서 한번이라도 제대로 읽어보기라도 했는지 의아합니다. 제대로 알고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돌아다니는 왜곡된 글을 보고 발끈해서 함께 행동하는 것이지요. 최소한 자신만 알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주장을 할 때에는 그에 대해서 알아보려는 노력이라도 기울여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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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당신의 자식이 전라도 목포 출신이라는 이유로 취직이 되지 않는다면 '차별'이 아니라고 말하시겠습니까?
과연 당신의 딸이 여자라는 이유로 임신을 하자마자 회사에서 해고당하면 '차별'이 아니라고 말하시겠습니까?
과연 당신의 손자가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똑같은 편의점 알바를 하고도 임금을 절반 밖에 못받는 다면 '차별'이 아니라고 말하시겠습니까?
과연 당신의 딸이, 당신이 이혼을 하여 한부모가정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면 '차별'이 아니라고 말하시겠습니까?
과연 당신이 고졸이라는 이유로 대졸인 후임자가 먼저 승진을 했다면 '차별'이 아니라고 말하시겠습니까?
과연 당신이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로 연말 보너스가 안나온다고 하면 '차별'이 아니라고 말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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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이 불이익을 받을 때는 입에 개거품을 물고 달려들면서, 현재의 개신교계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이 사람들이 정말 '예수님'을 닮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일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여자라는 이유로 '불결한 여자여, 저리 꺼져라'라고 말씀하셨나요? 소경 바디메오에게 '어디 눈먼 주제에 나를 만나려 하느냐'라고 말씀하셨나요? 베드로와 같은 어부에게 '돈도 없고 빽도 없는 어부 따위가 나를 따를 수 없다'고 말씀하셨나요? 예수님께서는 힘없고 가엾고 약한, 사회의 소외계층과 약자들을 위하셨습니다. 그 당시 그러한 그들에게 율법을 앞세우며 돌을 던지고 정죄하려 했던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게 만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같은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과연 누구를 선택하셨나요? 연약한 자들에게 '율법'을 들이대며 '너는 죄인!', '너는 지옥!'을 외치는 자들이었나요, 아니면 죄를 짓고 흠이 많은, 의지할 데 없는 자들이었나요? 현재 개신교계의 수많은 자들에게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의 모습이 투영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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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8장 5-13절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로마 백부장의 하인을 치유한 이야기. 이 이야기에서 백부장이 치유를 부탁한 소년은 남자 애인을 뜻하는 그리스어 'pais'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백부장이 자신의 하인을 말할 때는 'doulos'라는 단어를 사용했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pais'를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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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를 옳다고 인정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동성애 문제는 알면 알수록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도 있는가 하면, 자신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동성애적 성향을 가지게 된 사람도 분명 존재합니다. 개신교에서 무조건 이들을 정죄하고 손가락질하기 보다는, 그 상황에 대해 긍휼함을 갖고 중보하며 끌어안아야 할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개신교계에서 그토록 동성애에 대해 반대를 하는 에너지를 그들에게 손가락질 하는 데 사용하지 말고, 그들을 끌어안고 인도하는 데 사용하라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예수가 철폐했던 율법의 종교가 되었음을 선포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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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과 이 글에서 일치하는 바를 미리 간단히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약자를 사랑하고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개신교가 앞장서서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개신교계가 '차별금지법'에서 성적 취향을 이유로 반대하는 논리대로라면, 예수님께서는 안식일법과 제의법 등 교리를 어긴 일개 '죄인'에 불과하다.
-모든 죄를 사하고자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율법으로 다시금 십자가에 못박는 행위이다.
2. 문자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성서관과 해석
-레위기 18-20장 '성결법' 등 성경에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대로 쏙쏙 뽑아 지킬 것은 지키고, 반대할 것은 반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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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포스팅을 마무리 지으면서 이 '차별금지법'에 대해서 정치적인 부분이 아닌, 종교적 관점에서 얘기를 하고자 합니다. 최영실 성공회대 교수가 쓴 '성서를 통해 본 차별 금지법’이라는 글이 있어서 차별 금지법을 반대하시는 개신교인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덮어놓고 그냥 무조건 반대만 해대는 무뇌아적인 사람들에게는 기대하지 않지만, 진정 뜻있게 반대하는 개신교 신자분들과는 이 글을 읽고 생각을 나누어 보았으면 합니다.
성서를 통해 본 ‘차별 금지법’
-‘차별 금지법’ 원안에서 삭제/ 변경된 조항을 중심으로-
최영실(성공회대 교수)
시작하는 말
몇 년 전 인권단체와 시민단체들이 ‘사형제 폐지’ 운동을 벌리며 사형 제도를 폐지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 한국의 보수 기독교 단체인 ‘한국기독교총연합’(한기총)은 이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들은 이 성명서에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로부터 그럴듯한 성서 구절을 근거로 대면서, ‘사형제’가 성서에 근거한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난해인 2007년 10월 2일, 인권위원회가 시민단체의 의견을 수렵하여 4년 여 간의 노력 끝에 만들어서 권고한 ‘차별금지법’ 원안이 법무부에 의해 입법 예고되었다. 그러자 10월 22일 한기총은 대표적인 기독교보수단체들과 함께 ‘동성애차별금지법 저지 의회선교연합’이라는 단체와 함께 기자회견을 갖고 ‘차별금지법안’에서 성적지향 자구의 삭제를 위해 기도하며 온 힘을 기울일 것이라고 천명했다.1) 그리고 법무부 등 관련 부서를 항의 방문하여 의견서를 제출하고, 관련 국회 대책 기구를 설립하여 차별금지법 원안을 삭제/변경하는 일에 실력을 행사했다.2)
결국 법무부는 차별금지법 원안을 입법 예고한 한 달 후인 2007년 11월 구체적 사유에 대한 설명 없이 인권위가 권고한 차별금지 ‘시정명령’ 조항과 ‘이행 강제금’ 부과 항목, 그리고 ‘징벌적 손해배상’ 조항을 삭제하고, 차별금지법 원안에 들어있던 ‘금지 대상 차별의 범위’에서 ‘성적 지향’을 비롯한 다음의 항목을 삭제 / 변경하여 법제처에 제출했다.3)‘ 삭제/변경된 조항은 다음과 같다. ▲ 출신국가, ▲사상, ▲언어. ▲범죄전력, ▲보호처분, ▲병력, ▲학력, ▲용모, ▲성적지향,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 ▲혼인여부, ▲출산. 이에 대해서 시민단체들은 개정된 이 법안이 소수자 차별을 금지하자는 법인지, 오히려 차별을 하자는 법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고 항의하며, 이 법안을 인권위가 권고한 원안대로 재개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시민단체들은 약자를 사랑하고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따른다는 기독교가 앞장서서 ’동성애자를 차별하게 해 달라고 종교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주장하며, 차별금지법원안을 삭제/변경하는 데 앞장섰다는 사실에 경악하며, 한 목소리로 기독교계를 비판하고 있다.4) 도대체 예수를 잘 믿는다고 자처하는 소위 보수 기독교단체들이 이런 일을 한 것은 어떤 신앙에 근거해 있는 것인가? 한기총이 사형제 폐지에 대해 반대성명서를 내고, ‘차별금지법’의 원안을 삭제/변경하는 데 앞장 선 것은 성서에 대한 저들의 문자 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성서관과 잘못된 성서해석에 기인하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성서 자체가 그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간주되고 있는 성서 안에 약자를 옹호하고 모든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이 들어있는가 하면, 이와는 반대로 약자와 소수자, 이방인, 여성, 살인자와 범법자, 동성 간의 성 행위를 문제 삼고, 이들에 대한 차별과 심판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진술들과 법 조항들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성서 안에 들어있는 동성애를 비롯한 소수자 차별문제를 성서적으로 어떻게 볼 것인가? 근본주의자들이 내세우는 것처럼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는 하느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혹은 그 법들을 오늘날과는 무관한, 과거의 한 법조문으로 취급하고 말 것인가? 도대체 성서 안에 들어있는 차별적인 법 조항들은 언제 어떻게, 왜, 성서 안에 들어가게 되었는가? 이 글에서는 우선 구약성서의 율법서인 ‘토라’의 성립과정과, 토라의 본질로서의 ‘약자 옹호법’을 고찰해 볼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보수 단체들이 ‘동성애’를 비롯한 성적 소수자를 차별하는 근거로 삼고 있는 레위기의 성결법전의 본문을 살펴볼 것이다. 그런 다음, ‘금지대상 차별의 범위’ 에서 법무부가 삭제하거나 변경한 조항과 관련하여 소수자 차별의 문제를 예수와 바울의 입장에서 고찰해 볼 것이다.
1. 토라(율법)의 성립과정과 ‘약자 옹호법’
흔히 근본주의적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은 하느님이 직접 십계명을 비롯한 ‘토라’ (율법)를 돌 판에 기록해서 모세를 통해 우리에게 명한 것으로서,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는 ‘거룩한 말씀’으로 믿는다. 그러나 성서 안에는 하느님이 십계명을 비롯한 토라를 직접 두 돌 판에 써서 주었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하느님이 명한 계명과 법들을 하느님이 아니라 모세가 썼다는 기록들도 들어있다. 5)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의 장로와 백성들이 모세가 명한 법을 돌 판에 기록한 것으로 증언되기도 한다.6) 그렇다면 하느님의 법으로서의 ‘토라’는 언제 어떻게 성립되었을까?
구약학자들은 국가 이전의 판관시대의 초기에는 이스라엘의 문화 관습에서 자명한 윤리적 규범들과 ‘수치 되는 법’에 의해 판결된 것으로서, 이것은 ‘하느님의 법’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문서화된 토라가 성립된 시기는 시내산 전승이 아니라, 후대의 군주시대의 산물로서, 이 토라는 땅의 정작을 토대로 만들진 것이라고 밝힌다.7) 그리고 토라 안에는 그 기록 시기와 저자가 전혀 다르고 내용이 상충되는 여러 개의 법전들이 함께 들어있다고 사실도 밝혀내었다.8)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법전들은 ‘거룩한 법’으로, 모세에게서 유래한 하느님의 법으로 최종 편집되어 히브리 바이블인 마소라 사본에 함께 수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스라엘이 그 시기와 출처, 내용이 다른 법전들을 토라에 함께 묶고, 그것들을 모두 시내산 전승에 소급시켜서 모세와 하느님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증언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밝혀 보아야 한다. 그리고 상이한 법전들이 어떻게 어떤 식으로 토라 안에 함께 묶어 편집되고 있는지도 주목해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이 국가를 이루면서 주변 근동국가들로부터 받아들였던 군주법은 지배자의 편에서 만들어진 것으로서,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하기 보다는 도리어 그 법으로 가난한 자와 고아를 등쳐먹는 ‘악법’으로 작용되었다. 이사야의 다음과 같은 질책은 이 사실을 반영해 준다. “화로구나. 악법 제정자들과 엉터리 작가들아, 고통거리만 써 내어, 미천한 자들을 소송에서 밀쳐 내고 내 백성 가난한 자들의 권리를 뺏으려 하며 과부들을 저들의 먹이로 삼고, 고아들을 등쳐먹으려 하는구나.”( 사 10: 1-2).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주변 근동국가들에서 유래한 군주법이 약자를 억압하는데 이용되고 있음을 비판하면서, 이스라엘의 창조신앙과 출애굽 신앙에 근거를 둔 정의와 평화의 법을 제정하고, 그것을 시내산 전승의 ‘하느님의 법’으로 선포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역사적인 책임의식을 고향시키려 한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사실을 뒷받침 하는 것은 구약학자인 크뤼제만의 연구이다. 크뤼제만은 사회사적 연구를 통해 계약법전에 함께 묶여있지만 그 출처와 시기, 내용이 상이한 법전들을 언급한다. 그것은 북 이스라엘 말기에 성문화되어 있던 유일신 숭배에 관련한 종교적 법조문들(출 34: 11절 이하), 주전 8세기 이스라엘에서 지배자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반 약자법’으로서의 ‘미쉬파팀’ (출 21: 1-22: 19), 그리고 보다 후대의 것으로 약자를 옹호하는 것으로서의 ‘하느님의 자비의 법’(출 22: 20-23)이다.
‘하느님의 자비의 법’은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의 법에 기초하고 있다. 이 법은 ‘이방인, 여자, 아이, 노예들은 성문법정에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고, 법률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것으로서, 특히 과부와 고아, 이방인을 사랑하고,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지 말라는 것이 강조된다. 이 법에서는 가난하고 권리를 박탈당한 자들은 하느님이 ‘나의 백성’이라고 부르는 자들이며, 하느님은 이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분임을 강조한다. 9)크뤼제만에 의하면 계약법전 안에 예루살렘의 ‘반 약자법’이 들어오면서, 이방인과 가난한 자들의 보호와 노예법에 관한 조항은 지배자의 입장에서 수정되었고, 사법처리에 대한 규칙들(23:1-8)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후대의 것인 약자를 옹호하는 법으로서의 ‘하느님의 자비의 법’이 계약법전 안에 함께 들어옴으로써 반 약자법인 미쉬파팀은 이방인, 가난한 사람, 과부와 고아 및 동불보호 규정인 ‘약자보호법’을 통해 보충되고 수정되었다.10) 그리고 북이스라엘의 법전이 계약법전의 서두에 들어오면서, 사회적 법적 약자들 편에서 정의를 목표로 하는 행위가 하느님에 대한 유일신 숭배 사상과, 제의와 제사에 대한 규정들과도 동일시되었다. 그리고 이 법들 전체는 하느님의 법(출 20: 24-26)으로 제시되었고, 실정법으로 만들어졌다.11)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토라 안에는 분명 그 시기와 출처가 전혀 다른 법전들이 들어있다. 그러나 성서저자들은 오늘날에도 실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약자에 대한 차별을 금하고 있는 ‘약자 옹호법’인 ‘하느님의 자비의 법’을 토라의 계약법전 안에 수록하고, 그것들을 가장 마지막에 편집하여 수록함으로써 약자를 옹호하고 그들에 대한 차별을 금하고 있는 ‘하느님의 자비의 법’이야말로 하느님의 본래의 뜻이며 법임을 말하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사회적 약자를 차별하는 ‘하느님의 자비의 법’을 단순한 윤리나 지침서로 보아서는 안 된다. 도리어 그것은 군주시대의 지배자의 편에서 만들어진 ‘반 약자법’을 대체하고 있는 ‘하느님의 법’으로서 이스라엘에게 요구된 것이며, 오늘 우리가 귀 기울여 듣고 행해야 할 거룩한 ‘하느님의 법’인 것이다.
2. ‘성결법전’에 들어있는 차별조항과, 동성애 차별문제
21세기 오늘의 현실에서도 피 흘림을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여 “기저귀를 찬 여성은 성직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여성’, ‘동성애자’, ‘장애인’, ‘병력을 가진 사람’을 차별하는 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것은 레위기 18-20장에 들어있는 ‘성결법’이다. 이 성결법전 안에는 ‘부정’과 관련하여 먹지 말아야 할 부정한 음식에 관한 조항들, 피부병 환자들에 대한 격리 사항과 극심한 차별조항(레 13: 1-14: 32)을 비롯하여 피를 흘리는 여성들에 대한 이해하기 어려운 정결 의식과 법규(레 15: 19-33)가 들어있다.12) 그리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지킬 수도 없는 세세한 정결규정과 법 조항이 명시되어 있다.
성결법전에 들어있는 이러한 법조항과 제의규정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먼저 언급해야 할 사실은 성결법전의 규정들을 21세기 오늘의 현실에서 문자적으로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법조항들은 오늘 우리의 현실과는 달리 이스라엘이 포로생활을 겪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고, 사제문서 저자들의 민족주의적이고 배타적이며 가부장적인 사고가 성결법전의 법조항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사문서 저자들은 이스라엘이 포로 생활을 겪게 된 이유를 이스라엘이 야훼의 거룩함을 더럽히고 ‘부정한’ 삶을 살았기 때문으로 보았다. 그 때문에 ‘야훼의 거룩함’에 기초한 제사의식과 제의적 정결을 강조하고, 일상생활에서도 세사한 부분까지 언급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정함을 씻고 거룩함과 정결한 삶을 살 것을 촉구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의 가부장적 문화 전통에 의해 여성들의 피 흘림(월경)은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여성들에게는 이 부정함을 씻는 법 조항들이 차별적으로 부과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여성들의 월경은 씻어내야 할 ‘부정함’이 아니라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숭고한 피 흘림’이다.
그렇다면 오늘 보수적인 기독교계가 크게 문제 삼고 있는 동성애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는 레위기의 성결법전으로부터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동성애를 문제 삼는 것처럼 보이는 “너는 여자와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안 된다 이것은 망측한 짓이다”(레 18: 22)는 말은 레위기 18장 안에 들어있다. 그런데 레위기 18장의 첫 서두와 말미는 “너희는 너희가 살던 이집트 땅의 풍속도 따르지 말고, 이제 내가 이끌고 갈 땅, 가나안의 풍속도 따르지 말아라........”(레 18: 1-3, 레 18: 30) 고 말한다. 그리고 아 단락 안에서 친척간의 성 행위, 아버지가 데리고 사는 여자를 범하는 것, 이복 여동생을 범하는 것, 데리고 사는 딸을 범하는 것, 아내의 형제를 첩으로 삼는 것, 이웃의 아내와 간통하는 것, 짐승과의 교접 등을 모두 이집트 땅의 풍속과 가나안의 풍속을 따르는 ‘역겨운 짓’으로 규정하고, 이 역겨운 행위를 한 사람들과 관계를 끊어버리고, 스스로를 정결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레 18:1-30). 그러므로 여기에서 레우기 18장의 법전에 문제를 삼은 것은 ‘동성애’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주변 강대국의 풍속을 따르면서, 하느님이 이스라엘에 명한 ‘성결법’을 지키지 않는 모든 행위들이다.
성결법전에 들어있는 모든 법 조항은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레 19: 2)는데 근거해 있다. 이 ‘거룩하게 됨’의 요구는 레위기 19장-26장에서 계속된다. 여기에 들어있는 세세한 규정과 정결 규례들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이해할 수도, 지킬 수도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13) 이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 하느님 앞에서 ‘성결함’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구약의 예언자들은 절기와 제의를 행하면서 힘없는 자들을 억압하는 행위야말로 ‘역겨운 일’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므로 ‘성결’이란 부정함을 씻는 의식을 거행하거나, 문자적으로 성결법 조항을 자자구구 지키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소수자들을 차별하지 않고 가난한 자의 것을 뺏지 않으며 정의를 행하는 것이야 말로 ‘성결함’을 지키는 것이다.14)
이와 관련하여 레위기를 편집사적으로 고찰해 보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부정을 깨끗하게 하는 다양한 제의 규정들과 성결법들이 열거된 후에 레위기 25-26장에서 명하고 있는 ‘안식년법과 희년법’(레 25-26장)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안식년법과 희년법은 철저하게 약자를 옹호하고 차별을 감지하는 법 규정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법은 가난한 자와 빚진 자, 노예를 해방하라고 명한다.15) 그리고 이자 금지법 등 사회적이며 경제적인 약자 옹호법을 명시한다.16) 그리고 특별히 25-26장의 서두와 말미에 “하느님이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말을 덧붙여 넣어서 강조한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약자를 옹호하는 ‘안식년 법’과 ‘희년 법’이야말로 가장 크고 중요한 ‘성결법’으로 말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레위기 18장 22절과 20장 31절만을 뽑아서 ‘동성애’자를 정죄하는 자들이 있다면, 우리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동성애자를 정죄하는 자들은 과연 ‘성결’한가? 성결법전에 들어있는 무수히 많은 다른 성결법 조항들을 문자적으로 모두 그대로 지키고 있는가? 모든 부정함을 씻는 제의와 의식을 드리고 있는가? 외국인 노동자를 차별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있는가? 가장 중요한 ‘성결법전’인 ‘안식년법과 희년법’의 조항을 ‘하느님의 법’으로 믿고, 그대로 지키고 있는가? 이자를 받지 않고, 약자를 옹호하고 빚진 자와 품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고, 옹호하며 해방시키고 있는가? 만일 이 ‘안식년법과 희년법’을 지키지 않고, 당시의 문화적 관습에 기초한 ‘성결법’의 조항과 규례를 문자적으로 들이대며 피 흘리는 자나 병자, 동성애자를 ‘더러운 자’로 매도하고 정죄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모세의 법’에 근거한 ‘하느님의 거룩한 법’을 어기는 불의한 자이며, ‘성결법’을 어기는 부정한 자이며, 불법을 저지르는 사람이다.
3. 예수의 입장에서 본 ‘차별금지법’ 개정안
인권위원회가 권고한 차별금지법의 ‘금지 대상 차별의 범위’에 들어있는 조항들 중 삭제/변경된 조항을 나는 다음의 세 항목으로 분류해 보았다. 1). 출신국가, 사상, 범죄전력, 보호처분 2). 병력. 학력, 용모 3). 성적지향,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 혼인여부, 출산. 나는 첫 번째 항목의 조항들이 삭제된 데에는 분단 상황과 관련하여 우리 국가의 안보기관이 관련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본다. 왜냐하면 여전히 현행법으로 되어 있는 ‘국가보안법’에서는 대한민국 국적이 아닌 북한의 국적을 가진 사람이나 탈북자를 차별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의 주체사상을 옹호하거나 북한의 체제를 옹호하는 ‘사상범’,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보호처분’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중대한 범죄인으로서, 현행법에 의해 처벌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면 첫 번째 조항들이 삭제된 데에는 우리의 기업들의 압력이 있었을지 모른다. 기업들은 출신국가, 범죄전력, 보호처분 등을 이유로 취직을 거부하고, 이주 노동자들을 합법적으로 교묘하게 차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당시 사회에서 법을 어긴 죄인과 살인을 비롯하여 범죄 전력을 가진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을까? 예수는 결코 그들을 유대교의 율법이나 로마법의 잣대로 판단하지 않았다. 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는 당시 실질적으로는 분단 상태에 놓여있던 이스라엘의 북쪽 갈릴리 출신으로서, 더러운 이방인으로 차별 당했던 당사자였다. 또한 예수는 당시 지배자들이 만든 법 체제와 종교법을 어긴 범법자였다. 예수는 안식일법과 제의법 등 종교법과 교리를 어긴 ‘죄인’이었다. 그리고 누가의 증언에 의하면‘국가를 전복시키고, 백성을 선동한’(눅 23: 2, 5) 죄인으로서, 오늘날의 의미에서 보면 국가의 안보를 위협한 자였다.17) 그러나 예수는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 도리어 ‘하느님의 법’을 올바로 수행한 자라고 말한다.
토라의 법에 의하면 안식일을 어긴 사람은 돌로 쳐 죽임을 당해야 한다. 그러나 예수는 안식일에 밀 이삭을 따 먹은 사람은 ‘죄인’이 아니라, 도리어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야 할 ‘무죄한 자’(마 12: 7)라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제사를 원하지 않고 자비를 원하는 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때문에 예수는 당지 지배체제의 법과 제도에 의해 ‘죄인’으로 규정된 가난한 사람들이 ‘아무 죄도 없이’, ‘죄인의 멍에’를 메고 신음하는 자들이라고 선언한다. 유대전쟁 당시 예루살렘의 율법주의자들은 십계명의 ‘살인하지 말라’는 법을 내세우면서 갈릴리 사람들을 차별하고 ‘폭도’와 ‘살인자’로 매도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는 ‘살인자’가 아니라 도리어 그들을 차별하고 착취한 율법주의자들이야말로 불의한 자들이라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을 이용하여 가난한 갈릴리 사람들의 것을 착취함으로써 저들로 하여금 생존을 위해 투쟁하게 만들고, ‘걸려 넘어지게 만든 불의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예수는 율법을 내세우면서 가난한 동족을‘살인자’로 매도하기 전에, 그들이야말로 가난한 자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근본 요인을 먼저 제거하고, 착취한 것을 한 푼도 남김없이 돌려주라고 촉구한다(마 5: 21-26).
예수의 이 말은 오늘 우리가 ‘범죄 전력’을 가진 사람이나 ‘보호 처분’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극악한 ‘죄인’으로 매도하고 있는 현실을 되돌아보게 한다. 저들은 극악한 범죄가가 아니라 사실은 권력자의 편에서 제정된 법 체제와 제도 아래에서 버림받고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다가 ‘걸려 넘어진’ 자들이 아닌가? 지난날 유신시대의 악법들에 의해서 얼마나 무고한 많은 사람들이 범법자로 매도되었고, 보호처분을 받고 감옥에 갇히고 무고하게 죽임을 당했는가! 그리고 오늘날에도 불의한 제국들과 강자들에 의해 ‘테러리스트’, ‘범죄자’, ‘악의 축’으로 매도당하고, 무고하게 살해당하고 있는가?
두 번째 항목의 병력. 학력, 용모의의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기독교인들 중에는 ‘질병’이나 ‘장애’를 하느님의 벌을 받은 것으로 간주하고, 특히 정신질환이나 불치의 병, 나병, 에이즈에 걸린 사람들을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사탄적인 것으로까지 매도하며 차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구약의 성결법전에도 장애인, 특히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자, 피를 흘리는 혈우병 환자, 극심한 피부병 환자는 모두 ‘부정한 자’로 언급되었고, 그 부정함을 씻는 예식을 철저히 거행해야 하는 죄인들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혈우병 여인이나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자인 소경과 장애인을 죄인으로 간주하지 않는다.18) 도리어 예수는 19) 이들이 도리어 하느님의 참 모습을 보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며,20) 하느님의 잔치에 들어가는 하느님의 백성임을 선포한다.21)
누가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는 어렸을 때부터 ‘지혜’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예수가 ‘학력’이 많았다고 증언한 곳은 없다. 도리어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를 비난하는 율법학자들의 말을 빌어서, 예수가 성서에서 가르치는 학식을 가졌지만, 그 학식은 소위 말하는 학교 교육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한다.22) 그렇다면 예수는 ‘용모’를 따졌을까? 성서에서 예수의 부활의 첫 증인으로 증언된 막달라 마리아를 그린 화가들은 그녀를 예수를 유혹한, 매혹적인 용모를 가진 젊은 여인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누가의 증언에 의하면 이 여인은 ‘일곱 귀신이 들렸던’(눅 8: 2) 여인이었다. 당시 사회에서 흔히 알 수 없는 ‘질병’은 모두 ‘귀신이 들린 것’으로 간주되었다. 심한 질병을 앓고 신음하던 이 여인이 예수를 만났다. 그렇다면 당시 ‘일곱 귀신이 들렸다’고 할 정도로 심한 질병을 지녔던 이 여인의 용모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용모를 지녔을 리가 만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가난과 병고로 찌들고 이지러진 용모를 지닐 수밖에 없었던 여인들 곁으로 다가갔고, 그 여인들을 불러서 ‘섬김과 따름’의 참된 제자로 삼았다.23)
차별금지법 원안에서 삭제/변경된 세 번째 항목의 성적지향,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 혼인여부, 출산 의 항목에 관련해서 고찰해 보기로 하자. 동성애자를 옹호하는 입장에 서 있는 학자들은 예수의 선포에서는 어느 한 곳에서도 성적지향과 관련하여 동성애 문제를 거론하거나 동성애를 죄로 규정한 언급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동성애 차별을 결코 예수에게 근거지울 수 없다고 말한다.24) 어떤 학자는 로마의 백부장이라는 높은 지위에 있는 남자가 자기의 병든 하인을 고쳐주기 위해 예수께 나와서 간곡히 요청한 본문과 관련해서, 백부장과 하인의 관계가 단순히 주인과 종의 관계를 넘어선 ‘사랑하는’ 관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예수가 하인의 병을 고쳐달라는 백부장에게 동성애와 관련하여 한마디도 묻거나 꾸짖지 않고, 그의 요구를 들어준 것과 관련하여 예수가 어쩌면 당시에는 통용되던 동성애를 수용한 것이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25) 그러나 이러한 연구들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입장을 표명하기 어렵다.
‘성적 지향’을 차별금지 조항에서 삭제하는 데 앞장 선 보수 기독교 단체들은 동성애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어기고 있으며, 인류의 생명의 역사를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창조신학에서 말하는 ‘생명’은 단순한 생물학적인 생명이 아니다. 도리어 창조신학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법질서를 따라 자신의 욕구나 생명을 내어버림으로써 다른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라고 말한다. 우리는 복음서의 그 어디에서도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세기의 말씀을 지켜서 예수가 실제로 결혼을 하고 출산했다는 보도를 찾아 볼 수 없다. 그리고 ‘이성애’만을 옳은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성적 지향, 혼인여부, 출산과 관련하여 차별적인 태도를 취한 것을 찾아 볼 수 없다.
차별의 금지 항목 중 삭제된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에 관련해서도 분명하게 언급해야 할 것이 있다. 이 항목이 삭제된 것은 어쩌면 최근 우리 사회에서 3명에 한 명 꼴로 일어나고 있다는 이혼이나 재혼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가톨릭 국가에서는 지금도 마태복음 5장 26- 32절에 들어있는 ‘간음과 이혼’에 관한 예수의 말에 근거하여 이혼을 법으로 금하고 있다. 예수는 어떤 경우에도 이혼을 금하고, 이혼금지법을 제정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예수는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의 쌍방간의 이혼 문제에 관해 새로운 율법을 만든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 5장에 들어있는 이혼에 관한 예수의 말은 형식상으로는 법조문의 형식을 띄었지만, 법조문이 아니다. 그것은 유대 남자들이 구약의 이혼법을 악용하여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를 취하고 있던 것을 비판하고 그 남자들의 불의를 폭로하는 예언자적 말이다.26)누가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는 당시의 가부장적인 가족 형태를 고수하는 대신, 집이나 형제나 부모와 자식을 버릴 뿐 아니라 아내까지 버리고 자신을 따른 자들이 받을 상(눅 18: 29-30)27)에 대해 말한다.
동성애든 이성애든, 어떠한 가족 형태든 간에 예수가 요구한 것은 지배자들의 법과 체제에 의해 차별당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율법이 본래 요구하고 있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의 법을 올바로 수행하라는 것이다. 예수는 구약의 모든 율법과 계명들을 하나로 묶어 제시한다. 그것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마 19:19)는 것이다. 이 계명은 마태복음 25장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즉 목마른 사람이 요청할 때 물 한 그릇을 주는 행위로 제시되었다. 동성애자, 에이즈 환자 등, 우리 사회에서 더러운 죄인 취급을 당하며 처절한 소외감과 차별 속에서 죽어가고 있을 때, 사랑에 목말라하며 몸부림치고 있을 때 저들을 향해 손을 내어 밀고, 그들의 목마름의 호소를 들으며 함께 울고, 저들을 품에 안아 주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가 말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을 영접한 사람이다. 그가 바로 소외당하고 차별당하는 예수를 영접한 사람이고, 예수가 약속한 영생의 길에 서 있는 사람이다.28)
4. 바울이 선포한 ‘하느님의 의’의 법과 ‘차별금지법’
‘성적 지향’과 관련하여 동성애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은 로마서의 다음 본문이 분명히 동성애를 죄로 규정하며 금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까닭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끄러운 정욕 속에 내버려두셨습니다. 여자들은 남자와의 바른 관계를 바르지 못한 관계로 바꾸고, 또한 남자들도 이와 같이 여자와의 바른 관계를 버리고 서로 욕정에 불탔으며,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잘못에 마땅한 대가를 스스로 받았습니다”(롬 1: 27).
바울은 정말 로마서의 이 본문을 통해 ‘성적 지향’을 문제 삼고, 흔히 말하는 동성애자나 레즈비언들을 비난하고, 그들의 행위를 죄로 규정하고 있는 것일까? 동성애자에 대해 옹호적 입장에 서 있는 학자들은 이 본문이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동성애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로마서 1장 24절과 26절이 언급하고 있는 것, 즉 ‘욕정과 탐욕에 의한’ 행위를 문제 삼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이 본문에서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서로간의 사랑의 행위에서 비롯된 동성애가 아니라 당시 로마시대에 유행했던 행위들, 즉 자유인인 주인이 일방적으로 어린 소년을 성적 대상으로 삼은 것을 문제 삼고 있다는 것이다.29)
동성애를 문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로마서의 이 구절은 로마서 전체의 맥락에서, 특별히 바울이 선포한 ‘복음’인 ‘하느님의 의’에 관한 내용과의 관련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다는 자신의 소명을 밝힌다(롬 1: 1-15절). 그런 후에 그리스도 소식인 ‘복음’ 안에 나타난‘하느님의 의’의 법에 관해서 증거 한다(롬 1: 16-17절). 본래 유대교에서 ‘의’는 종말적인 구원과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이 ‘의’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선한 행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30) 그러나 바울은 유대교의 구원 교리에 대립하면서, 인간의 율법적 행위로는 결코 이 ‘하느님의 의’를 얻을 수 없다고 선언한다.
바울은 ‘하느님의 의의 법’인 그리스도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인간의 상황을 ‘율법 아래에 있는 인간’의 상황으로 묘사한다. 율법 아래에 있는 인간은 그리스인이든 유대인이든 간에 한 사람도 의롭다고 평가받을 수 없는 ‘죄 아래에 있는 삶’이다. 로마서 1장 18-32절은 하느님의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이 ‘죄 아래 있는 상황’을, 로마서 2장 1-29절은 율법 아래에 있는 ‘유대인의 상황’으로서, 그들 모두는 하느님 앞에서 의롭다는 선언을 들을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이들의 상황은 로마서 3장 9-20절에서 결론적으로 율법의 행위로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간에 그 누구도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31)
이러한 상황에서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다. 그것은 “지금 율법 없이 나타난 하느님의 의(롬 3: 21)의 사건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모든 불의한 인간의 대속하기 위해 하느님 자신이 스스로 자기의 아들을 대신 화목제물과 대속 제물로 내어준 사건으로 말한 초대교회의 전승을 받아들인 후에,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사건을 하느님 인간들의 모든 불의함을 거저 값없이 용서하고, 의롭다고 여겨준 ‘하느님의 의’의 사건으로 해석해 낸다. 그리고 이방인과 유대인 할 것 없이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모든 불의한 자들을 의롭다고 여겨준 법이 바로 ‘하느님의 의의 법’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사건에서 나타난 ‘하느님의 의의 법’으로서의 ‘기쁜 소식’인 ‘복음’이다.
바울은 이 ‘복음’에 근거하여 당시 로마 교회 안에서 음식 먹는 문제와 절기를 지키는 문제로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비방하며 싸우고 있던 것에 대해 권면한다. 그들은 모두 그들의 율법적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의의 법에 의해 ‘거저’, 용서를 받고 용납함을 얻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하느님의 법’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리스도는 그들만이 아니라 그들이 비판하고 있는 그 사람을 위해서도 죽으셨다( 롬 14: 15). 그러므로 그들이 율법이나 사상, 종교적 교리문제로 비판하고 있는 그 사람들도 하느님은 거저 용서하고 사랑하며 용납한 하느님의 종들이다. 그러므로 종교나 교리, 사상, 이데올로기를 내 세우며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강자들’은약한 자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먼저 버려야 하고(롬 15: 1-3), 자기의 사상이나 종교적 교리와 주장을 먼저 버려야 한다.32)
동성애 차별에 이용되어왔던 로마서 1장 27절의 진술은 하느님의 의의 법인 ‘복음’ 이전의 율법 하의 상황에서 이방인의 불의를 열거하는 단락에 들어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이 문제 삼은 것은 동성애 자체가 아니다. 물론 당시 이방 세계에서 자행되었던 성적 취향이나 동물과의 수간도 한 항목이 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바울이 문제 삼은 죄는 동성애가 아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이 만물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을 알면서도 하느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리지 않고,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고, 더 나아가 온갖 불의와 악행과 탐욕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바울은 하느님께 감사하지 않음, 자기의 지혜를 자랑함, 탐욕에 사로잡힘, 악의, 시기, 살의, 분쟁, 사기, 적의, 수군거림, 중상, 하느님을 미워함, 불손함, 오만함, 자랑함. 악을 꾸밈, 부모를 거역함, 우매함, 신의가 없음, 무정함, 무자비함의 행동(롬 1: 19-32절)을 모두 이방인들이 복음 이전에 율법 아래에서 자행하던 행위로 열거한다.
오늘날 자신들을 의로운 자로 자처하면서 동성애자를 차별하고, 성적 지향이 다른 사람을 죄인으로 정죄하는 사람들은 바울이 ‘이방인의 죄’와 관련하여 열거한 ‘무정함’, ‘무자비함’, ‘오만함’의 죄를 저지르고 있는 자들이다. 또한 바울이 ‘유대인의 죄’와 관련하여 지적한 것처럼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다. 바울은 “그가 누구든지 죄가 없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롬 2: 1)하고 선포한다. 동성애를 비판하는 이성애자들은 ‘남을 심판하는’(롬 2: 1) 죄를 범하고, 소외와 차별을 당하면서 신음하는 자들을 외면하고 멸시하는 ‘무정한 자들’이며, ‘무자비한 자들’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사람을 차별함이 없이 대하신다.”(롬 2: 11)는 ‘복음’의 기쁜 소식을 알지 못하고, 율법의 행위 없이 모든 사람을 용납한 하느님의 ‘은혜의 법’을 유대교적인 ‘율법의 행위’로 바꾸어 놓고 있는 불의한 자들이다.
로마서 1장 27절을 근거로 내 세우면서 동성애자를 차별하고 죄인으로 몰아세우고, 또 동성애들을 회개시키겠다는 보수 교회들의 설교는 잘못된 것이다. 바울의 신학에서는 “너희가 돌이켜 회개하면 하느님이 용서하실 것이다”라는 말이 없다. 도리어 바울은 하느님이 인간의 모든 불의함에도 불구하고, 차별 없이 거저, 조건 없이 용서하고 사랑했다고 선포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죄’와 ‘율법’의 법이 아니라 ‘의의 법’에 순종할 것을 권면할 뿐이다,33) 바울이 선포한 ‘하느님의 의의 법’은 ‘이미 저거’ 모든 불의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을 용서했다는 ‘기쁜 소식’이다! 그러므로 이 ‘기쁜 소식’을 듣는 사람은 그 누구도 차별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죄를 범한 나를 용납한 것처럼 내가 비판하고 있는 그 사람들도 불러서 일으켜 세우실 것( 롬 14: 4)이기 때문이다.34) 무엇보다 그리스도가 죽은 것은 나만이 아니라 오늘 한국교회와 사회가 차별하는 그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롬 4: 15)이다.
맺는말
재계의 기업들과 한국의 보수 기독교단체들의 막강한 세력에 굴복한 법무부는 결국 인권위원회가 권고한 ‘차별금지법’ 원안의 차별 금지 항목에서 ‘성적 지향’을 비롯한 10개의 조항을 삭제/변경하여 법제처에 제출했다. 그런데 ‘동성애자차별금지법저지의회선교회’는 금년 1월 13일, 국회기자실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법제처를 통과한 차별금지법안을 다시 문제 삼았다. 비록 ‘성적 지향’의 항목이 원안에서 삭제되었지만 법무부가 차별금지법 제 3조 1항에 ‘그 밖의 사유로’를 첨부한 것은 동성애가 차별금지 조항에 들어갈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는 것이다.35)
이러한 일들을 지켜보면서 성서와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차별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새삼 생각하게 된다. 독일의 히틀러는 정치적 목적으로 만든 나치의 법 조항들에 의해 ‘장애자’와 ‘동성애자’를 죽이고, 수만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그러나 ‘십자가’와 ‘그리스도’를 기치로 내어걸고 자행된 ‘십자군 전쟁’과 교리를 빌미로 일어났던 수많은 교리논쟁과 ‘종교 전쟁’에 의해 키로틴에 의해 목이 잘리고 마녀로 몰려 화형당하고 목숨을 잃은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어디 그 뿐인가! 오늘날도 불의한 강자들은 하느님과 정의의 이름으로 약소국가를 무력으로 침략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하면서도 자신들의 행위가 성서적이며 기독교적이라고 내세우고 있지 않는가!
기독교 전래 초기에 우리 사회에서 차별받던 계층의 백정, 노예, 여성들에게 차별 없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 주었던 한국교회는 분단과 군사독재정권, 신자유주의의 체제를 거치면서 변질되었다. 대다수의 기독교는 반공노선에 서서 북의 형제자매를 ‘적’과 ‘원수’로 가르치고, 군사독재 정부가 만든 불의한 법 체제에 침묵하면서 물질적인 교회성장에 몰두했다.36) 뿐만 아니라 교회는 몰 역사적인 신비주의와 기복신앙에 몰두하고 있다.37) 그런데 군사독재정권 시절 ‘정교분리’를 내세우며 예배와 기도, 금식 등 종교적 행위에만 몰두했던 보수 교회들은 언제부터인가 ‘이라크 파병 지지’, ‘한미동맹 지지와 북한 김정일 타도’를 외치며 시청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사형제 폐지 반대, 사립학교법 재개정,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일에 보수 기독교 세력을 결집시키면서 정치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종교가 세력화되어 정치권력에게 힘을 가할 때, 그들에 의해 자행되는 법은 그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무소부재하고 절대적인 신의 법으로 변한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로마의 정치 권력가들이 유대 종교가들의 세력에 굴복함으로써 이루어졌다.38) 종교가들은 예수의 가르침과는 달리 율법과 교리의 잣대로 ‘무고한 사람’을 비난하고 죽이는 일까지도 ‘하느님의 일’을 수행하는 것으로 확신한다. 이것은 예수를 죽였던 율법주의자들도 마찬가지였다.39) 이 얼마나 무섭고 잔인한 일인가.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율법과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수를 죽인 유대 교권자들처럼 성서의 몇 구절을 뽑아서 그것으로 힘없는 무고한 사람을 차별하고 죽이는 일을 시급히 그쳐야 한다. 성서 안에 들어있는 다양한 시기의 법전들을 구분하고, 성서 저자들이 이스라엘을 포로에서 해방시킨 출애굽 신앙에 의해 약자를 옹호하는 ‘하느님의 자비의 법’을 토라에 수록함으로써 지배자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반(反) 약자법’을 수정하고, 이스라엘의 율법을 약자와 이방인을 옹호하며 차별을 금지하는 법전으로 만들어 갔는지를 보아야 한다. 부정함을 씻는 다양한 성결법전에서 어느 한 구절만을 선택적으로 택하여 이용하면서 그것을 근거로 동성애자를 부정한 자로 취급하거나 차별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안식년법과 희년법이 하느님의 거룩한 ‘성결법’임을 올바로 인식하고, 사회적 소수자를 차별하는 모든 법을 개정하는 일에 힘을 모아야 한다.
예수와 바울의 복음을 듣고 있는 우리는 더 이상 ‘동성애’를 사회악으로 규정하면서 매도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가장 보잘것없는 자들’을 영접하라는 예수의 요구에 귀 기울이고, 거저 용서받은 자로서 나 자신은 그 어떤 누구도 차별할 권리가 없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이 점에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권위원회가 권고한 본래의 ‘차별금지법’ 원안에서 삭제된 조항을 다시 원안대로 회복시키고, 원안에서 삭제된 ‘차별 시정명령’ 조항과 ‘이행 강제금’ 부과 항목, ‘징벌적 손해배상’ 조항을 모두 다시 회복시키는 일에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모으자. 그리고 갈라디아서 3장 29절의 저 복음을 따라 다시 한번 분명하게 외치자. “그러므로 이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주인이나 종, 남자나 여자가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또한 출신국가, 사상, 언어, 병력, 범죄전력, 보호처분, 학력, 용모, 성적지향,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 혼인여부, 출산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차별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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