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탈출을 꿈꾸며/대한민국

구한말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덕수궁 나들이

자발적한량 2008.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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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가본 덕수궁이었습니다. 항상 촛불집회하면서 저 앞 시청광장에만 주구장창 있고..어렸을 땐 고궁을 무척 많이 가봤는데..20대가 된 이후로는 이런 곳에 한번도 발걸음을 하질 못했네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대한문 앞에서의 수문장 교대식


 다행히 시간에 맞춰 도착했습니다.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수문장 교대식을 하루에 3차례((11시, 14시, 15시 30분) 진행하거든요~ 또한 11시20분부터 12시에 덕수궁에서 청계천 길로 보신각을 돌아 덕수궁으로 돌아오는 순라군 행렬의식도 있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더운 날씨에 고생하십니다~


 조선시대 왕궁에는 수문군이라는 군대가 있어 궁궐문을 개폐, 경비, 순찰하는 업무 등을 수행하였습니다. 서울시는 조선시대 수문군이 교대하는 의식을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1996년부터 재현해오고 있습니다. 왕궁 수문장 교대의식은 영국 왕실의 근위병 교대의식과 비견되는 화려하고 품위 있는 한국전통 궁중 문화 재현행사 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취타대까지!


 교대의식은 왕궁수문장 교대의식의 시작을 알리는 절차인 개식타고, 군호, 즉 암호를 매일 병조에서 세 글자 이내로 정해 국왕께 보고하여 국왕의 승낙을 받은 후 승정원에 내려주면 승정원 책임자 주서가 수문장과 수문군에게 알려주는 절차인 군호하부 의식, 도성을 순찰한다는 의미의 의식으로 덕수궁 대한문에서 시청광장까지 순라하는 시청광장 순라의식, 궁성문을 수위하고 있는 수문군과 순라를 마치고 들어오는 교대 수문군과의 교대 절차인 교의 의식, 모든 의식을 마쳤다는 의미의 “예필”이란 말을 찬청하고 수문군들이 숭례문 순라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는 수문군들과 함께 수문장청으로 복귀하는 예필 의식순으로 진행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교대하고 쉬러 갑니다..ㅋㅋㅋ


 수문장 교대의식은 수문장, 수문군, 승정원 주서, 액정서 사약, 취라척, 엄고수 등으로 구성이 됩니다.
 많은 시민들을 비롯한 외국 관광객들이 이 교대의식을 관심있게 지켜보는 모습을 보며 영국 버킹엄 궁전의 근위병 교대식처럼 세계적인 관광상품으로 발전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전통복식체험코너! 무료!


 수문장 교대 의식이 진행되는 곳 앞에선 전통복식체험도 함께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서울시에서 창의시정으로 진행하는 행사인데요. 무료입니다!! 이거 좋은 아이디어네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난 수문장인데..


 수문장보단 용포가 어울릴 듯한 T군인데..☞☜(혼자만의 착각인가요..ㅋㅋ) 이렇게 찍어놓으니 교대의식하다가 도망나온 수문장같군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덕수궁 입장권


 수문장 교대의식을 다보고 이제 덕수궁에 들어가보겠습니다. 금액은 대인 1,000원이군요..그림 속의 석조전과 분수..저도 들어가서 찍어봤습니다..ㅎㅎ사진은 밑에..ㅎㅎ

 덕수궁은 조선의 궁궐로 본래 이름은 경운궁입니다. 광해군과 인조가 이 곳에서 즉위하였습니다. 또한,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곳이기도 합니다. 1611년부터 1615년에는 조선의 정궁, 1897년부터 1907년에는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쓰였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교체된 수문장과 수문군.


 경운궁은 광해군 시절인 1611년 월산대군이 머물렀던 정릉동 행궁을 확장하면서 붙인 이름입니다. 원래는 흥경궁으로 하고자 하였으나, 광해군이 전대의 궁호는 적절하지 않아 합당한 궁호를 여러 개 올리게 하여, 경운궁이라고 이름하게 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궁궐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은 고종 연간인 1896년입니다. 이후 1897년부터 1907년까지 대한제국 시기에 황제가 정무를 보던 법궁(法宮)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1904년에 불이 나 궁궐의 상당 부분이 소실된 후 중건이 시도되었는데, 당시 국가의 정치 상황이나 재정 여건상 궁궐 권역과 건물 규모에 적지 않은 축소가 있었습니다.

 1907년 7월에 헤이그 밀사 사건의 여파로 고종이 일본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한 후 경운궁에 머물렀는데, 이때 고종의 궁호를 '덕수'라고 하였기 때문에 덕수궁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순종은 창덕궁으로 이어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사적 제124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


 현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입니다. 원래 정전인 덕수궁 중화전의 정면에 있었던 것을 나중에 동쪽으로 옮긴 것입니다. 1897년 고종이 명례궁을 옛이름인 경운궁으로 다시 부르게 하고 1906년 4월에 그 정문인 대안문을 수리하기로 하고 문의 명칭도 대한문으로 고쳤습니다. 수리하면서 겹처마에 단청을 하였으며 각마루에 양성을 하고 취두 ·용두 ·잡상을 얹었다. 현판은 당시의 한성판윤(현재 서울시장에 해당) 남정철이 썼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중화전의 문인 중화문


 중화전의 문인 중화문입니다. 중화문은 궁궐의 중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팔작집인데, 건축 양식은 중화전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원래의 중화전은 중층정전이었으며, 당시 중화문은 현재의 문보다 규모가 더 웅대하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덕수궁의 정전, 중화전


중화전은 덕수궁의 정전으로, 정면 5칸에 측면 4칸인 다포계 팔작 지붕의 목조 건물입니다. 현재 중화전은 보물 81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원래는 중층 건물이었으나, 1904년에 화재로 소실된 후 1906년에 단층으로 중건하였습니다. 1897년에 고종이 원구단에서 즉위한 후, 중화전(당시는 태극전)에서 조하를 받았다고 합니다. 원래의 명칭은 즉조당이었으나, 1897년 10월 7일에 고종이 태극전으로 고치도록 명하고, 다음해인 1898년 2월 13일에 다시 태극전을 중화전으로 고치도록 명하여 지금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중화전 앞의 품석


 중화전 앞에 있는 품석은 조선시대에 벼슬아치의 높낮이순으로 관계의 품을 새겨 세워둔 돌입니다. 정일품부터 종구품까지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으며, 맨 앞 줄에 있는 정일품이 최고의 품계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중화전의 어좌.


 중화전 내부 중앙간 뒤편에 마련된 어좌입니다. 어간 고주 사이에 단을 마련하고 그 위 중앙에 용대를 놓았으며 용대 뒤편에는 투각곡병과 일월오악병풍을 놓았습니다. 어단에는 앞면과 좌우 측면에 보계가 있고 난간을 설치했습니다. 어좌 위에는 보개를 마련하였는데 적주에 낙양각하고 그 위로 닫집을 얹어 장엄하게 장식하고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중화전 앞 드므


중화전 앞에 드므가 있었습니다. 드므란 '넓적하게 생긴 큰 독'이란 뜻의 순수한 우리말로 그 안에 물을 담아 놓으면 불귀신이 왔다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 달아난다는 주술적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화재가 났을 때 실제로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광명문 안의 신기전, 흥천사 범종, 자격루


 광명문은 원래 함녕전의 정문이었으나, 1904년 함녕전은 소실되고 이 문만 남았습니다. 1938년 미술관을 개관할 때 이 문을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여 흥천사 범종과 창격궁 보루각의 물시계인 자격루 전시처가 되었습니다. 현재는 신기전까지 전시되어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분수와 석조전이 어우러진 풍경


 날씨가 더워 잠시 벤치에서 쉬면서 석조전과 석조전 앞의 분수를 찍어보았습니다. 덕수궁 입장권에 있는 장면을 정면으로 찍은 것이지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덕수궁미술관. 까르띠에展.


 덕수궁미술관은 국립현대미술관의 분관입니다. 1937년 이왕직박물관으로 지은 건물로 8·15광복 후 석조전의 부속건물로 사용되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이 1998년 12월에 개관되어 덕수궁미술관이란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근대미술전문기관으로, 근대미술관련 기획전과 소장품 전시회를 비롯해 근대미술 관련 조사·연구·출판 등의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시민들을 위한 작품설명회, 강연회, 미술강좌도 열고 있다고 합니다. 1998년 12월 1일 개관한 이래 2007년까지 총 46회의 전시회가 열렸고, 약 500만 명의 관람객이 미술관을 다녀갔습니다. 미술관이 자리한 덕수궁의 석조전 서관은 1938년에 완공된 우리나라 근대 건축양식을 대표하는 건물입니다. T군이 갔을 때는 까르띠에 소장품전이 한창이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국립근대미술관으로 활용될 석조전


 돌로 지어진 건물라는 뜻의 석조전은 기본 설계는 영국인 G.D.하딩, 내부 설계는 영국인 로벨이 하였으며, 1900년에 착공하여 10년 만에 완공하였습니다. 3층 석조 건물로 1층은 거실, 2층은 접견실 및 홀, 3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거실·욕실 등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앞면과 옆면에 현관을 만들었습니다. 기둥 윗부분은 이오니아식, 실내는 로코코풍으로 장식한 서양식 건축기법이 특이합니다. 18세기 신고전주의 유럽 궁전건축양식을 따른 것으로 당시 건축된 서양식 건물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건물입니다. 이곳에서 1945년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으며, 6·25전쟁 이후 1986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1992~2004년에는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되다가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이 건립되면서 이전하였고, 국립근대미술관으로 활용될 예정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신구가 융합된 스카이라인!?


 석조전에서 바라본 스카이라인입니다. 중화전의 뒤뜰과 함께 중화전과 석어당의 지붕이 프라자호텔 등 서울 중심부의 고층 건물들과 어우러져 보기 괜찮은 스카이라인을 만들어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회랑 건축물인 정관헌


 정관헌은 1900년 대한제국 시절 고종이 다과를 들거나 연회를 열고 음악을 감상하는 등의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덕수궁 안에 지은 회랑 건축물입니다. '정관헌'이란 솔밭과 어우러진 함녕전 등의 고 건축물을 고요하게 내다보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궁 내의 근대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됨과 동시에 최초의 조선과 서양의 절충식 궁궐건물물입니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었으며, 정면과 좌·우측 발코니가 화려하게 꾸며져 있고, 회색과 붉은색 벽돌로 벽면이 다양하게 장식되어 있는 등 화려하고 이색적인 모습입니다. 다양한 건축재를 사용하여 지은 건축물로 서양풍의 건축 양식에 전통 목조 건축 요소가 가미된 독특한 모습입니다. 한때 태조·고종·순종의 영정과 어진을 모시기도 한 곳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임금의 침전인 함녕전


 함녕전은 임금의 침전입니다. 1897년에 지었는데 1904년 수리공사 중 불에 타, 지금 있는 건물은 그해 12월에 다시 지은 건물입니다. 이 전각은 고종이 거처하던 곳으로, 임금자리를 순종에게 물려준 후 잠시 수옥헌에서 거처하였으나,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긴 후 다시 이곳에서 거처하다가 1919년 1월 21일 여기에서 승하하였습니다. 안쪽은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우물천장으로 만들었고, 네면 모든 칸에 벽을 두르지 않고 창을 달아 놓았습니다. 조선 후기 마지막 왕실 침전 건물로 건축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제목을 짓자면 '한국의 美'..식상한 제목인가요?ㅎㅎ


 어두워서 자세히 나오진 않았지만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으로 간결하게 장식한 익공 양식입니다. 구름과 덩굴문양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함녕전의 처마는 겹처마이구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접견실로 쓰였던 덕홍전


 함녕전 옆에 있는 전각이 덕홍전입니다. 원래 이 자리에는 한때 명성황후의 빈전과 혼전으로 쓰이던 경효전이 있었습니다. 1904년 대화재 이후 경효전을 수옥헌 방면으로 옮긴 뒤, 1906년 지금의 덕홍전을 짓고 1911년 개조하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덕홍전은 덕수궁에 현존하는 건물중 가장 나중에 지어진 건물이 됩니다. 덕홍전은 주로 외국사신들이나, 대신들을 만나던 접견실로 쓰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덕홍전의 내부 전체는 넓게 터져 있고,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내부 모양 또한 접견실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내부에는 봉황과 오얏꽃 문양 등을 화려한 금색으로 장식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대한제국기에 황실의 문장으로 쓰인 것이다. 입구에는 간이 월대를 두어 정면에는 소맷돌을 둔 계단을 설치했고, 좌우에는 작은 계단을 설치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덕홍전이 예전의 모습은 아닌 듯 합니다. 덕홍전이 경효전으로 쓰이던 당시의 기록사진과 덕수궁 평면도를 통해 보면 함녕전과 별도의 영역으로 담을 사이에 두고 나누어져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덕홍전 동쪽 세 번째 칸에 문이 달려 있는 것으로 봐서 이는 곧 통로가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졌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초석에도 그 흔적은 남아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덕홍전의 잡상들.


 덕홍전의 잡상입니다. 중화전의 잡상은 9개였고, 덕홍전의 잡상은 7개였습니다. 그 위쪽으론 취두와 용두가 배열되어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준명당과 즉조당


 준명당과 즉조당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준명당은 처음에는 준명전이었으나 준명당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곳은 한 때 고종황제가 거처하면서 외국사절을 접견하기도 한 곳으로, 후에는 고종과 순종의 초상화를 봉안하기도 하였습니다. 즉 준명당은 경운궁의 편전으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동쪽에 자리잡은 즉조당과 같은 기능의 건물로 양식도 유사합니다. 즉조당의 퇴간이 동쪽으로 치우쳐 있는 데 비해 준명당의 근간은 서쪽으로 치우쳐져 있습니다. 월랑으로 즉조당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준명당은 깊고 밝은 집이라는 뜻입니다. 덕수궁 준명당 현판의 '명'자가 '明'이 아닌 '目+月'인 것은 단순한 오자가 아닌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보아야 한다'는 뜻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즉조당은 1608년에 광해군과 인조가 이곳에서 즉위하였으며 1623년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가 즉위한 뒤부터 즉조당, 즉 왕이 등극한 건물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즉조당은 1904년에 경운궁 대화재로 소실된 것을 같은 해에 중건하였으며, 1897년 10월에는 태극전이라 불렸다가 다시 중화전으로 바뀌어 불렸는데, 후에 현재의 중화전이 신축되면서 본래의 즉조당으로 환원되었습니다. 즉조당은 1593년 선조가 파천에서 돌아와 시어소(임시로 왕이 머물던 곳)로 사용하였던 건물입니다. 이 건물은 1897년 고종이 아관파천 후 경운궁으로 옮겨온 뒤 1902년 중화전이 건립될 때까지 법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후 고종의 후궁인 엄귀비(영친왕 생모)가 순종이 이곳에서 즉위한 1907년부터 1911년 7월 승하할 때까지 거처하였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석어당. 뭔가 허전하다 했더니..단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덕수궁 내의 유일한 이층건물이며 1904년의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같은 해에 다른 전각들과 함께 중건했습니다. 원래의 석어당은 임란 때 선조가 피난으로부터 환도하여 승하할 때까지 16년간 거처하였던 곳이며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이 건물 앞뜰에 꿇어 앉혀 죄를 책한 곳이기도 합니다. 임금들이 임진왜란의 상황을 상기하는 선조임금의 추모처이자 인목대비의 유폐처이기도 했습니다. 단청을 하지 않은 것이 특징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세종대왕 동상.

 이 동상은 1968년 5월 건립된 세종대왕의 좌상입니다. 조각가 김경승이 제작하였고, 애국선열 조상건립위원회와 서울신문사가 공동으로 건립하여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리고 있습니다. 좌대는 석재로 하고 3면에는 세종대왕 때에 발명된 각종 과학기재들을 양각하여 장식하였습니다. 세종대왕상이 덕수궁에 있는 것은 옳지 않다 하여 세종로 중심에 광장을 조성하고 그곳으로 이 동상을 옮긴다는 계획이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덕수궁의 연못.


 모든 궁에는 명당수가 흐르는 어구가 있고, 거기에는 석교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덕수궁인 경우 지세 자체가 왕궁이 들어앉을 만한 곳이 아니어서인지 인공적으로 명당수의 금천교를 만들었습니다. 현재의 연못은 어구가 변형된 것이라고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덕수궁 돌담길.


 가을의 낭만인 덕수궁 돌담길. 이 돌담도 파란만장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광복 후 태평로 일대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담장이 허물어져 나갔고 대한문으로부터 태평로 파출소까지 6m 안쪽으로 도로를 넓히면서 담장을 허물고 돌담 대신 철책으로 다시 담장을 친 것입니다. 당시 서울시는 덕수궁을 도시민의 공원, 놀이공간으로 만든다는 계획 아래 궁내에 스케이트 장을 만들고, 벤치를 놓는가 하면은 상점과 음식점을 지었습니다. 담장을 철책으로 만든 것도 길에서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는 알량한 발상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 담장은 원래의 사고석 담장으로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랍니다.

 무더운 더위가 엄습하고 있습니다. 조금 선선해지면 덕수궁에 한번 놀러가보세요~ 가을에 덕수궁 돌담길 걸어보시는 것 잊지 마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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